주변부에서 찾은 중심성
-베네딕트 옵션-
이춘성 목사(고신대 일반대학원 기독교 윤리학 박사과정)
개신교 선교 약 13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개신교는 한 때의 폭발적인 성장을 뒤로한채 서구 기독교가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 들었던 그 길을 빠르게 따라 잡고 있다. 당장은 서구 교회와 비교할 만큼 교세의 급격한 변화는 없을 지라도 20, 30대가 비어있는 한국 교회의 향후 10년은 암울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교회가 느끼는 불안은 상당하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의 불안은 초조로, 초조는 분노로 변하고 있다. 안팎을 향한 이들의 무차별적인 분노는 교회를 한국 사회에서 더욱 고립 시키고 있다. 과연 한국 교회를 고립의 늪에서 구출할 방법은 없을까? 10년 후의 한국 교회는 어떤 모습일 것이며, 그 대책은 무엇일까?
나는 드레허(Rod Dreher)의 책, 『베네딕트 옵션』The Benedict Option을 읽으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10년 후 한국 교회가 찾을 답이 무엇일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이 책이 서구 기독교의 몰락의 과정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서양 중심적인 책이라는 단점이 있을지라도 그의 시대와 사상에 대한 안목과 분석은 지역을 초월해서 우리에게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서양 사상과 기술을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빠르고, 비판 없이 흡수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무비판적인 수용의 태도가 경제와 과학 기술 면에서 선진국을 빠르게 따라잡도록 한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이들의 실수와 오류를 가장 많이 수용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건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쇠락의 문제는 서양 교회의 쇠락과 유사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드레허는 서구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떠나 인간을 중심에 두게 되었는지 그 역사와 철학적인 흐름을 분석하고 있다. 이 논의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사실 이미 인간이 중심이 되어 버린 현대 사회에서 문제의 진원지를 안다는 것 외에는 이를 해결하는 데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양과는 다른 철학, 종교의 역사를 지닌 우리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은 이미 주변부로 밀려난 지 오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세상의 진정한 주인인 하나님을 어떻게 중심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드레허는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엘리트 기독교인들을 훈련하고, 문화의 중심부로 이들을 침투시킴으로서 중심의 영역에서 기독교인과 기독교의 가치를 확장 시키려는 전략은 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드레허는 주변부에 밀려난 하나님과 함께 우리도 주면부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드레허는 기독교인이 중심을 차지하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주변부로 밀려나게 한 것이라는 주장한다. 역사를 볼 때, 중심에 들어간 인간은 하나님이 중심에 있다고 선언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에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드레허는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하나님의 중심 성을 회복한 한 이례적인 한 인물을 소개한다. 그가 바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까지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누르시아(Nursia) 출신의 수도사, 베네딕트(Benedict)이다. 베네딕트가 세운 수도원은 당시 세상의 흐름과는 정 반대의 생활 방식을 추구함으로서 어찌 보면 외딴 섬과 같은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그 이유는 베네딕트 수도원이 세상을 위해 세상과의 단절을 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역행하는 세상을 향해서 창조의 원리에 따른 옳은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베네딕트는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자연스럽게 추구한 것이지 의도적인 단절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베네딕트 수도원은 나그네를 대접하고, 병원을 운영했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농사 짖는 법을 가르치는 등의 일을 감당하였다. 자신의 재산과 권리를 포기하고 이를 기꺼이 형제와 자매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 이러한 선한 실천의 원천은 매일 행하는 이들의 기도와 성경읽기, 예배와 노동 등의 규형 잡힌 경건한 삶과 습관에 있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주부면부에 위치하면서 이들의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주변부로 밀려난 하나님을 찾아 주변부로 찾아 갔지만 이러한 이들의 움직임을 통해 하나님은 중심의 자리를 다시 회복하셨다. 그리고 이들의 성경의 윤리에 따른 거룩한 삶은 중심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세속의 관심을 다시금 불러 일으켰다.
드레허는 과거에 일어난 베네딕트 수도원과 같은 수도원 운동의 정신을 주변부로 밀려난 현대 서구 교회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교회와 신자가 중심에 서려고 할 때, 하나님은 주변부로 밀려났다는 역사의 교훈을 설득력 있게 그의 책을 통해 증명하고, 독자들에게 주변부로 그의 관심을 돌리게 만든다. 이런 그의 외침이 비단 서구 교회만을 향한 부름이 아니라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 예를 들어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인 정당 참여와 투표를 통해 입법과 정치권력을 선하게 사용하는 것이 기독교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가?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승리감은 잠시일 뿐, 오히려 권력에 빌붙은 기독교라는 오해와 비판만 받았다.
이러한 시도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또한 누군가는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일을 할 사람들이 반드시 다수일 필요는 없다. 또한 이 소수의 헌신된 사람들은 반드시 주변부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 언제든지 주변부에 머물 수 있는 그런 태도를 지닌 자이어야만 한다. 주변부에 위치한 다수의 신앙 공동체와 언제나 주변부로 돌아 갈 수 있는 중심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이런 자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먼저 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향하여 매일 우리와 우리의 자녀, 동료 기독교인들의 손을 잡고 함께 주변부로 밀려나 계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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