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윤리 일반

복음과 공정

복음과 공정

큰 잔치 비유 (누가복음 14:15–24)

지난 몇 달 동안 ‘공정’이란 화두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여러 정치 현안 때문에 두 진영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싸운 이유도 그 이면을 보면 공정에 대한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의 요구에 기성세대들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 연설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말해 전 국민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처럼 사회는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계층의 사다리는 평범한 소시민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지 않았고, 특권은 우리 사회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며, 권력과 교육의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합법이란 테두리 안에서 공정을 비웃었습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높았습니다. 모두 원하면 뛰어 넘을 수 있는 울타리가 공정이라면 그 울타리는 누구에게는 터무니없이 낮고 어떤 이에게는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높았습니다. 대통령의 시정연설에서 공정이란 말이 27번이나 언급 되었지만, 말이 많다는 것은 공정이 얼마나 이루기 힘든 것인지를 반증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초대 되어 그곳에 초대된 율법교사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계셨습니다(1). 이 자리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사회적으로 대학 교수나 공공기관의 장과 같은 지위와 존경을 받으며, 종교와 윤리에서 깨끗한 자들이 모인 자리이었습니다. 그런데 온 몸의 피부에 수포가 일어나 진물이 나는 병에 걸린 초대받지 않은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2). 그는 그의 병 때문에 사람들로 부터 배척당하였지만, 단지 그의 외모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그의 병의 원인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에는 의료 행위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은 병자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있는 부정한 사람,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은 자로 취급하였습니다. 더하여 이런 그와 함께 식사하면 그들도 부정해진다고 생각하였지요. 그의 병은 전염병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존재 자체가 전염병이었습니다. 사실상 그는 죽은 자나 다름없었습니다. 

 

또한 당시에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서로 한 가족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 자를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식사 자리에서 초대할 자는 없었지요. 행여 식사자리에 이런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그를 쫓아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병자를 받아주시고 그의 진물이 흐르는 병든 피부를 만지시며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는 죄 많은 손대기도 싫은 더러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아픔 때문에 치료가 필요한 병자, 위로와 돌봄이 필요한 하나님의 어린 자녀, 사랑에 구걸하는 영적 거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사람들은 수군거렸지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12~14)

 

식사 자리에 나타난 병든 불청객은 누가 봐도 돌봄이 필요한 병들고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에게 어떤 것으로도 되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와 달리 식사 자리에 초대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만큼 되 돌려 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지요. 상부상조 할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비슷한 처지와 환경, 경제 수준과 교육 수준이 되는 흔하게 하는 말로 말이 통하는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인정해온 불공정도 이와 유사한 것입니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은 서로 친구나 가족으로 이어져 우정과 가족애로 서로를 돌보아 줍니다. 상대의 아이들의 미래를 함께 걱정해 주고 도움을 주며 서로의 우정과 가족애를 과시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소유한 경제적이며 공적인 힘을 활용하지요. 하지만 불법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단지 가족이고 친구의 자녀이니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항변합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르는 것은 이들의 모임과 식사자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의도하지 않았을 지라도 자연스럽게 그들이 가질 기회에서 배제 당한다는 것입니다.

 

절차가 정당하다고 하여 기회도 공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힘을 가진 자는 자신의 힘을 자신과 동류의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최대한 의식적으로 절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잔치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아닌 이와는 전혀 다른 조건에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가르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자와 병자와 장애인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오라는 초대, 복음은 어떤 특정한 위치나 조건에 있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공정합니다. 공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들은 사람의 삶은 특별히 공정해야 합니다. 공정하지 않은 복음을 복음이라 부를 수 없으며, 공정하지 않는 신자의 삶은 복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큰 잔치의 비유에서 왕의 초대를 거절한 자들은 돌려 줄 것이 전혀 없는 자들과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회적 기반과 경제적 발판이 되는 ‘땅’, 지속적으로 일 할 수 있고 수입을 창출하는 직업의 의미인 ‘소’, 사회의 일원이자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결혼’ 등 이런 당연한 조건들을 갖춘 자들 이었습니다. 이들의 면모를 보면서 저는 요즘 공정의 울타리 안에 들어 갈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대학 청년들의 모습이 어른 거렸습니다. 집을 살 여유가 없고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결혼을 포기하는 청년들,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이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부모들의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이제는 결혼과 자녀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특권이 되고 있습니다. 모두 공정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공정이 무너진 원인을 찾고 원인을 제공한 자들을 응징한다고 무엇이 달라질 까요. 우리 또한 조금의 특권이 주어지면 당장 이 특권을 이용하여 내 가족과 친구를 위해 사용하려들 텐데요. 

 

오늘 예수님은 큰 잔치를 베풀어 모든 사람들을 초대한 어떤 왕의 이야기를 통해 특권을 지닌 자들은 그 특권을 사용하기 위해 왕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자신의 특권이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은 아무런 힘도, 특권도 없는 자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가난과 병, 장애, 이방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어떤 공정의 범위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자들, 버림받은 자들이 이들이었습니다. 왕은 이런 자들로 자신의 잔치를 채웁니다. 그리고 이들이 구원받은 우리입니다. 특권을 누리기 위해 거절한 자리를 채운 버린 받은 자들이 기독교인인 신자의 정체성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늘의 아버지, 왕이신 우리 하나님의 공정하신 사랑을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자들에게 자신의 기쁨을 나누고자하십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자신의 특권을 선물로 여기지 않고 이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초대를 선물로 여기지 않는 자들은 스스로 천국을 거절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24)

 

오늘 날 이 사회에 공정은 자신의 특권을 자신의 소유와 성취 물로 여기는 것 때문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정은 특권을 선물로 여길 때 세워질 것입니다. 제도가 공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공정을 세우며, 그 마음은 복음이 제시하는 은혜, 선물의 마음입니다. 오늘 날 교회는 공정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일부 교회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특권의 대물림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복음을 모르는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울타리를 뛰어넘어 모든 이에게 구원의 초청장이 전해지는 것, 바로 공정한 초대가 기독교의 정신이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