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욕에서 사랑으로...(기독교 성윤리의 기초)
이춘성
대학생 선교단체와 교회의 청년부, 공동체 사역을 하면서 청년들의 최대 관심사는 직업과 더불어 이성이다. 오죽하면 모든 대화의 끝은 이성교제라는 의미로 ‘깔때기’라는 말이 만들어 질 정도이다. 이것은 사실 믿지 않는 젊은이들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하며, 인간의 최대 관심사이다. 특히 이성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만남에만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성적인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종종 이성교제에 대한 상담을 하는 경우, 사역자들에게 까지 와서 털어 놓는 고민은 성관계에 대한 문제들이 많다. 과거와 확연히 다른 점은 과거에는 사랑과 섹스를 어느 정도 구분하여, 섹스는 결혼 까지 사랑이 발전 했을 때 가능하다고 여겼다면, 현제는 사랑하면 섹스는 언제나 가능한 것 아니냐는 쪽으로 기독 청년들의 사고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최근 조사에 의하면, 기독교인 청년들 중 과 반수가 넘는 비율이 현재 섹스를 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는 비율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교회가 한국 사회의 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를 볼 때, 과거의 성에 대한 보수적인 인식도 기독교 신앙과는 별개로 사회의 보수성에 기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빨리, 자연스럽게 사회의 인식의 변화에 발맞춰 기독교인의 모습도 변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욕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성을 만드시고 성적 욕망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신원하는 말한다. 인간을 여자와 남자로 창조 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은 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했다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연합의 관계가 반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적인 관계는 다른 육체적 쾌락과 달리 상호적 관계와 친밀한 연합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성적인 연합은 단지 육체의 만족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신원하는 “성의 이런 독특한 기능과 성격 때문에 몸은 일종의 성례적 기능을 가진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고귀한 성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이것은 우리 인간을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 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욕이다. 신원하는 “정욕이라는 단어는 본래 ‘사치’ 혹은 ‘탕진’을 의미하는 라틴어 ‘룩수리아’(luxuria)에서 왔는데, 자신을 위해 상대의 육체와 감정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하는 성적 욕망”이라고 정의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정육을 ‘잔인한 죄’라고 칭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상대의 육체와 정서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정욕은 상대를 목적이 아닌 수단, 대상으로 만든다. 훼얼리도 이를 인간을 고독하게 만드는 죄라고 정의한다. 서로 만나지만 서로를 철저히 소외시켜, 오직 욕구만 남게 하는 죄라는 것이다. 이럴 경우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최대의 미덕이 되고 결국 이를 위해 어떤 방법도 정당화 시킬 수 있게 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이러한 과도한 성에 대한 집착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이후 인간들이 느끼는 성적 쾌락은 이전 보다 훨씬 줄어들었다고 지적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써 온전한 연합을 이루었던 타락 이전과 달리,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성을 통해 상대를 지배하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면 타락 이전에 누렸던 그 환희와 쾌락은 결코 맞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성적 욕망은 결국 탐색, 정욕으로 나아간다. 성경에는 이러한 예들이 많이 나온다. 보디발의 아내의 이야기, 다윗의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탐한 이야기,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을 범한 이야기, 다윗이 밧세바를 탐한 것, 솔로몬이 두었던 수많은 후궁들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그 안정을 얻을 수 있는 대체물로 인간은 끝없는 성적 욕망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하나님 사랑과 가장 닮은 인간의 사랑이 아가페도, 플라토닉도 아닌 에로스라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남녀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가장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창조와 다아있다. 인간의 사랑의 최초의 모습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최초로 반영하는 인간 사랑의 최초 모습이 에로스인 것이다. 우리가 정욕에 빠질 때, 이것이 죄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를 정욕으로 대치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을 여기에서 찾으려는 것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상태일 때, 정욕에 빠지기 쉬울까?
신원하는 이를 “최상 정욕”, “바닥 정욕”으로 나눈다. 바닥 정욕이란 우리가 나태에 빠져, 특별히 할 일이 없고 삶에 목표가 없으며 무료할 때 정욕에 빠질 위험이 많다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도 그 원인을 나태라고 지적한다. 그는 수도사들이 수도적 삶이 따분하고 싫증나는 매너리즘에 빠질 때, 음란한 상상과 정욕이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한편 세이어즈는 인생의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와 바닥에 있을 때 인간은 모두 정욕에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다윗이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생각하고 교만 했을 때, 밧세바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이스가 지적하듯 인생의 고점에 있을 때는 정욕에 빠지기 쉬우나 이에서 벗어나기도 쉽다. 그 이유는 다른 방향으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길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거나, 좌절이나 나태의 상태에 있으면 정욕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결국 정욕에 빠지면 수많은 상처를 남기고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잠언은 정욕에 빠진 자는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Pr 6:26)고 지적한다. 신원하는 “정욕은 본인과 가족에게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입히고 공동체에도 큰 피해를 주게 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욕으로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자신과 공동체만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는 성경적 설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음행에 빠지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갈 5:19,21; 고전 6:9-10).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정욕의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까? 가장 현명한 방법은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카시아누스도 정욕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 했다. 그러므로 피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고 했다. 성경의 인물인 요셉도 그렇게 했으며, 욥도 처녀를 보지 않기로 했다(욥31:1). 에바그리우스는 교회에서 자신을 사모하는 한 유부녀에 마음이 끌리자 과감히 유명해지는 자리를 떠나 무명의 자리로 도피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에바그리우스는 마귀가 “오늘 유혹을 피하지 못하더라도 내일 회개할 기회가 있다”라고 속이며 정욕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회개에 있어 내일은 없다. 내일 회개할 것을 왜 지금 하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에바그리우스는 정욕에서 벗어나려면 느끼고 깨닫는 순간 과감하게 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두 번째는 시대정신을 읽고 이에 대해서 바른 비판의식을 자져야 한다. 신원하는 현대의 거짓말로 첫 번째는 무엇이든지 즐길 수 있다는 것과, 두 번째는 성적 즐거움은 그 어느 것보다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현대인의 교리와 같다. 현재 주목받는 대중 철학자 중 강신주는 인터넷 라디오에서 ‘다 상담’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곳에서 그는 몸의 주체성을 말하면서, 성적인 만족이 없을 때, 과감히 이혼이나 결별하고 다른 사랑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것이 서로를 진정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을 단지 성적 만족을 추구하는 동물로 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그럴듯한 사상에서 스스로를 지켜야 하다. 지금 성은 철학과 정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있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 방법은 지금 배우자와의 관계에 집중하고 그 안에서 만족함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배우자와의 관계를 성적인 만족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마스 힐 교회 목사인 마크 드리스콜과 그의 아내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청년 마크와 사귀기로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하는 친구가 연 파티에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 그리고 마크와 결혼을 한 후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성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다. 성을 죄로 여기고, 무감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우정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더 깊은 사랑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남녀의 사랑은 결국 영적 우정의 관계를 통해 깊어진다는 조언을 한다. 이들은 과거 결혼을 성적인 계약으로 여겼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인 동반자, 친구로서 자리 매김을 하는 순간 이들의 성적인 관계는 더욱 풍성 해지고 비로소 성을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연합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도 결혼을 성적 욕망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만연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혼의 목적이 아니라 결과이며, 뜻밖의 선물이자, 기쁨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목적이 되면 결혼은 서로의 만족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격하될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나이가 들면서 쇠퇴하게 될 것이며, 배우자가 아닌 다른 젊고 아름다운 대상을 찾아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더 강한 성적 자극을 탐닉할 것이다. 훼얼리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는 오늘 날 섹스에 대해 계속적으로 흥분 상태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우리 사회 자체가 흥분 상태에 있고, 우리 사회에는 우리 사회 전체나 개개인들로서의 우리 자신들을 평정하게 하는 영적 피난처가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 것에 대해 반대하기 어렵다.”
마지막 해결책은 바로 영적인 공허를 채울 수 있는 영적 충만함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말했듯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은 요한1서 1장 전반에서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 관계는 삼각형의 관계로 양 축에 인간들이 위치하고 제일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 어느 한 축이 무너져도 서로의 관계는 멀어진다. 이러한 유기적이 관계 가운데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릴 만드셨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서로 하나님을 추구 하고 바라볼수록 인간의 관계는 저절로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영적인 채움이 인간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계에 더 집중하려 할수록 우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인간다움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동물의 형상으로 대치되고 마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인간의 죄를 썩어질 것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대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 인간은 더욱 고독해 지고, 인간은 만족을 위해 자신이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추구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게 되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른 사랑의 회복이다.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그 사랑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 우린 비로소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 훼얼리는 “사랑은 우리의 선의 뿌리이자 동시에 우리 악의 뿌리”라고 한다. 이 말은 사실이다. 사랑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인간을 바로 사랑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사랑의 방향을 인간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두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정욕에 빠지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심각한 죄이다. 우리는 정욕에 탐닉할수록 더 큰 만족이 있을 것 같이 생각하지만, 우리의 몸은 깡마르며, 영혼은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갈증은 다른 갈증을 낳듯 결국 만족 없는 삶으로 비극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 궁극적인 갈망, 갈증인 하나님의 사랑의 회복이 일어나기 전에는 말이다. 성은 궁극적인 하나님 사랑이 새겨진 깨지기 쉬운 크리스털 거울이란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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