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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 일반

기독교 몸 철학을 통한 새로운 변증의 시대가 온다.

기독교 몸 철학을 통한 새로운 변증의 시대가 온다.

-낸시 피어시(Nancy Randolph Pearcy)의 『네 몸을 사랑하라』Love Thy Body의 후기-

2019년 12월 3일 이춘성

 

 

 

 

새로운 기독교 변증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번에 "복 있는 사람" 출판사에서 나온 낸시 피어시(Nancy Randolph Pearcy)의 새 책 『네 몸을 사랑하라』Love Thy Body는 이러한 나의 생각을 확고하게 하였다. 낸시 피어시와 나의 공통점은 20세기 중반의 기독교 변증가인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와 그의 제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쉐퍼가 기독교 변증을 위한 삶의 공동체로 시작한 라브리(L'Abri)를 거쳤다. -나는 약 10년을 살았다.- 이 사실은 우리가 기독교 변증의 DNA가 세포 깊이 박혀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이유로 난 낸시 피어시의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성 윤리를 통해서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낸시 피어시는 이 책을 통해 쉐퍼의 문화적 변증 방법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 몸의 본성에 대해서 논증하면서 우리를 창조 앞으로 인도하고 있다. 아래에서 나는 왜 낸시 피어시가 몸에 대한 신학과 성 윤리를 통한 기독교 변증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이 시대에 왜 중요한지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려한다.

 

1. 오래된 변증

과거의 기독교 변증은 이론에 기초한 철학과 논리를 개발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을 소개한다면 단연 라브리의 설립자인 프란시스 쉐퍼 이다. 그가 기독교 변증을 시작할 무렵, 약 1950~60년대의 상황은 존재, 실존에 대한 물음이 서양 세계를 뒤덮고 있었다. 당시 서구 사회는 세계 대전 후 인간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국가에 대한 불신, 학문과 종교에 대한 회의가 뒤덮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실존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회의는 극심한 정서주의로 인간을 이끌었다. 이에 대항하여 이성과 감성의 통합을 주장하며,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 지향하는 바라는 사실을 강하게 논증한 인물이 프란시스 쉐퍼 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성에 대한 변증(『이성으로부터의 도피』)이 쉐퍼를 비롯한 당시의 기독교 변증에 강하게 나타났다. 이는 시대의 요청이었다. 

2002년 처음으로 내가 라브리에 가서 공부할 무렵, 이전부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해 오던 다수의 인물들은 이러한 과거의 이성 전통의 기독교 변증을 고수하고 있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하고 기독교 변증과 세계관을 공부하면서 내가 느낀 어려움에 대해서 지금 생각할 때, 이성 중심의 변증이 시대의 요구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란 사실을 요즘 깨닫는다. 시대는 이미 변했던 것이다. 변증이란 불변하는 교리가 아니다. 변증은 시대의 정신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변해야만 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이후에 라브리의 간사로서 영국에 근무하면서 나를 비롯한 영국과 다른 나라 간사들이 동일하게 느꼈던 것은 기독교 변증이 현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들 그 필요를 느끼고 인정할 뿐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또한 여전히 전통적인 변증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선뜻 기존의 변증 방법을 전면 제고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라브리와 간사들을 통한 새로운 변증의 영역에 대한 혁신과 대안은 제시되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 라브리를 찾아오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젊은이들의 수는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이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2. 여전한 영육 이원론

지난 몇 년 동안 난 학위 논문(기독교 윤리)을 위한 공부를 비롯하여 성윤리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해오면서 이 시대가 몸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단적으로 이 시대는 몸을 보여주고, 몸을 바라보며, 몸을 소비하고, 몸을 보호하며, 몸을 사랑한다. 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몸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오히려 몸에 대한 무수한 관점들을 재생산하였고, 무엇이 몸에 대한 바른 관점인지 흐리게 하였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신체를 전통의 윤리에 가두려 하지 않고 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선택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모든 것들을 하나의 기호로 이해하고 세계를 마치 매트릭스 같은 숫자와 기호의 배열로 환원하여, 보는 것이 아닌 생각이 보는 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하여 공통의 객관적인 생각이 아닌 무수히 많은 공약 불가능한 생각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대상을 대상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행간, 이면의 뜻, 은유를 위한 도구로 대상을 이해한다. 물질은 그렇게 정신의 소비재로 낭비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분열적 사고방식이다. 의식이 몸에 앞서며, 의식이 몸을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의식 우월주이이다. 이것은 그리스 식 이원론이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몸에 대한 관심은 무수한 몸에 대한 생각들을 만들어 내고  그 과정에서 대상인 몸은 사라지고 몸에 대한 생각들만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몸은 없다. 단지 생각 된 몸들만 있을 뿐이다.

 

3. 물질적인 인간의 몸

몸 소위 물질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오히려 정신 우월주의의 이원론을 강화시켰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예상된 결과였다. 서구사회가 지닌 그리스로부터 이어오는 세계에 대하 이분법적 인식이 그 원인이었다. 자연과 이데아의 세계를 구분하는 두 세계의 세계관은 중세에 은혜와 자연, 초월과 내재 등의 용어로 다시 교회와 서구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이를 쉐퍼는 상층부와 하층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 층 구조로 설명하였다. 

 

 

 

 

이 구분은 계몽의 시대를 지나며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 간섭할 수 없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역인 은혜와 초월의 세계인 상층부에 머물러 있어야 했으며, 인간과 자연은 물질의 세계인 하층부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이 이신론을 탄생하게 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인간의 정신 활동이나 종교성도 뇌의 호르몬의 활동인 물질 작용의 일부라는 뇌 과학의 설명까지 이어진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초월을 상상하는 것이지 초월에 이를 수 없으며, 초월도 인간과 자연 안에 들어 올 수 없도록 만든 것이 세계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정신 활동은 물질 활동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인 결론은 오히려 정신과 몸의 위계를 형성하도록 하였다. 몸을 통제하는 가치와 윤리가 초월과 은혜에서 오지 못한다면 결국 정신이 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인간의 정신이 신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끌었다. 정신 활동이 모든 물질 활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몸이란 제한된 그릇에 가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커즈와일(Raymond Kurzweil) 등이 주장하는 특이점(singularity) 이론이다. 인공지능도 이 가능성을 크게 만들어주는 연구로서 인공지능의 최종 목표는 특정 인간의 지능이 기능할 수 있는 새로운 육체인 기계 안에 인간의 지능을 그대로 옮길 수 있는 기술을 획득하는 것에 있다. 이렇게 되면 인격은 모양을 달리하여 영원히 존재한다. 인간은 영원한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고대로 부터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온 구원일 것이다. 예를 들어 윤회라는 내세관은 실제로 동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 인류에 걸쳐 존재해 온 보편적인 종교 원리였다. 한 인격이 다양한 몸으로 계속하여 존재하면서 이전의 기억은 무의식의 저장장치에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윤회 사상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도깨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커즈와일의 주장과 큰 차이가 없다. 단지 다른 것은 커즈와일은 인간 스스로 그 자연의 방법을 터득하여 조정하자는 것이고, 불교나 힌두교, 샤머니즘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불확실성 혹은 종교에 맡기자는 것이다. 공통점은 이 둘 다 몸과 정신을 물질로 보며, 정신이 몸보다는 더 궁극적인 물질로 본다. 사람으로 치면 정신은 사람의 몸이고 육체는 그 사람이 매일 갈아입는 다양한 옷들이다. 그러니 그의 취향대로 다른 옷을 입는 것은 존중 받아야 할 선택이다. 또한 취향에 따라 선택한 옷을 입을 때, 이에 대한 만족은 옷이 아닌 사람이 느낀다. 이같이 성적 만족감도 정신의 몫이기에 이를 위해 옷을 갈아입듯 다양한 몸(남자의 몸이든, 여자의 몸이든 아니면 제3의 몸이든)을 선택하는 것도 당연한 권리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현대의 몸 철학과 성윤리의 논리적 결론이다.

 

4. 영적인 인간의 몸

이와 달리 기독교는 윤회를 부정하며, 인간의 육체는 단 한 번 주어지며, 다른 육체로 영혼이 옮겨갈 수 없다. 또한 죽어 썩은 육체는 다시 부활하여 죽음 이전의 모습을 지닌 인격으로 영원히 존재한다. 기독교에서 몸이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성에 속한 본질이다.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는 당시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시체가 길거리와 들에 방치되거나 집단으로 매장되거나 불에 태워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를 보고 키프리아누스는 신자들에게 이들이 신자가 아니라하여도 모든 인간은 영혼과 육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는 신자들이 죽은 자들의 시체를 인간 답게 묻어주고 장례식을 치러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신자들은 죽은 자들의 몸을 정성스럽게 환대하고 묻어 주었다. 

성경은 종말에 심판을 위해 신자만이 아닌 모든 인간이 육체로 부활하여 성자 예수님 앞에 설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요한은 요한 1서에서 당시 거룩한 신이신 성자 예수님이 더러운 육체를 가지고 오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육체만 빌린 껍데기 인간에 불과한 존재라는 주장을 펼쳤던 이단 사상에 대해서 반박하였다. 요한은 예수님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변증 하였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1서 1:1~2)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창1:26).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여 창조하였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다른 창조물과 구별된 특성을 설명하기 위한 영혼과 육체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 윤리에서 죄는 몸과 정신을 구분하여 의도성에 따라 책임을 묻을 뿐 아니라 동시에 피해에 따른 그 책임도 묻는다. 의도성이 있는 죄 뿐 아니라 과실, 무의식, 마음에 품는 죄도 죄 이다. 예를 들어 아무런 악한 의도 없이 길을 걸어가다가  다른 사람이 내 발에 결려 넘어졌다고 하자. 이것 또한 과실이지만 죄이기에 나는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고 피해당한 자를 위해 보상하는 것이 옳다. 이를 통해 볼 때, 기독교는 몸을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몸을 단순히 영혼과 의식을 제거한 물질로만 보지 않는다.

몸과 영혼은 결코 따로 분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한 존재이다. 몸과 의식 또한 그렇다. 이는 달리 말해 기독교가 몸의 중요성과 책임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현대의 어떤 몸 철학보다 몸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증거이다. 몸을 벗어 버려야 할 헌 옷 취급하지도, 탈출해야할 감옥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 주어진 몸에 감사하며 어떻게든 이를 가치 있게 여기기 위해 노력하고 가꾸는 것이 기독교의 몸 철학이다.

 

5. 몸에 대한 두 세계관의 충돌 그리고 기독교 변증의 새로운 기회

현대는 몸에 대한 이 두 세계관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것은 성 윤리라는 용어로 특정 전문가들의 논의인 것처럼 보이지만, 스마트폰, 컴퓨터, 영화, 만화, 음악 등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가장 자극적인 방식으로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고 있다. 논리가 아닌 감각을 통해 먼저 경험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이미 몸에 대한 현대 세계관에 노출되어 있다. 몸의 오염은 성경적 인간관을 통해 볼 때, 이미 정신의 오염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의도 없이 우연히 그런 영상과 상황을 접했다 하여도 죄에 오염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죄책감이 뒤따른다.

이러한 죄책감에 대해서 자신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니 인간은 당연히 부당하게 생각할 것이고 이를 회피할 방법을 생각할 것이다. 가장 쉬운 해결책은 몸과 정신의 분리이다. 몸이 반응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몸의 충동이라 변론한다. 이것이 지나치면 중독이라 부르면서 치료가 필요한 병으로 규정한다. 이렇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책감을 피해간다. 이렇게 인간은 의식과 몸을 분리하여 죄책감을 해결하고, 결국 몸을 죄와 죄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다. 하지만 몸은 결코 죄에서 자유하지 않으며, 인간의 인격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역사를 보면 이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동성애 대한 죄 인식도 제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옳은 길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주어진 몸을 사랑할 수 있도록 잘못된 인식을 바꾸고, 서로 돌봐주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이 부족하면 이를 위해 더 싸워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주어진 몸을 다른 몸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또한 주어진 몸의 정체성을 다른 정체성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노력은 헛 수고 일뿐이다. 이에 따른 비극적인 결말이 분명하게 예상 된다 할지라도 누구도 개인의 선택을 막을 수 없는 것이 현대의 더 큰 비극이다.

 

결론

몸에 대한 두 세계관과 이에 따른 논리적 결과와 이들의 삶의 열매는 아직 과정 중이다. 역사 가운데 계속해서 실험되고 증명 되었지만 인간은 현재를 살기에 눈으로 목격하지 않는 이상 확신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적 몸의 이해는 지난 세기를 지배하면서 성경적인 온전한 모습이 아닌 세속에 오염되고 왜곡된 몸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받아 몸에 대한 바른 성경적 세계관을 뿌리 내리는 데 실패하였다. 그리고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기독교의 기회일 수 있다. 비록 충격이 심하지만 이제 우리의 오류를 발견하고 성경에 기초한 바른 몸에 대한 신학과 철학을 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바른 몸에 대한 신학과 철학을 새롭게 새워 세상의 몸 사상들과 정면으로 마주하여 무엇이 바른 세계관인지 겨룰 수 있는 새로운 변증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차대한 새로운 변증의 시대에 낸시 피어시 같은 세심한 기독교 변증가들은 그 방향을 읽어내고 있다. 그러기에 그녀의 책은 현대 기독교 변증의 최전선에 성윤리가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