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십자가 Mere Cross(마가복음 14:1~9)
유월절이 이틀 남았을 때,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의 식사자리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져와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들 중 여렇이 여인에게 화를 내면서 비싼 향유를 허비한 것을 나무랐다. 나드 향유 한 옥합은 은화 300 데나리온, 노동자의 약 일 년 치 급여 이상의 가치나 되니 이를 차라리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면 더 좋지 않겠냐고 말한다. 허무하게 예수님의 머리에 이를 쏟아 붙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행동이 아니라고 이미 예수님의 속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이 기대했던 답을 하시지 않고 마치 이들이 비난하는 당시의 부유한 지도자들처럼 자신을 위해 값비싼 기름을 바르는 것을 문제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7~8)
예수님은 여인이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잔치의 다른 이들은 예수님이 다른 권력자들과 똑같이 부를 탐하고 외식하는 외선 자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변명이 궁색하다는 것이다. 아무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는 데, 그리고 이 곳에 모인 자들은 예수의 혁명에 참여할 동지들인 데, 이런 변명으로 자신의 탐욕을 그럴 듯이 치장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타도하고 혁명을 일으키려 하는 대상과 예수님은 어쩌면 동일 부류일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모인 자들은 당시의 유대 사회 가장 천한 자들이었다. 시몬은 과거에 나병환자로서 모든 사람에게서 외면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에게 치유를 받았다. 이를 통해 그는 낮은 자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꺼리는 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가 나병환자이었을 때, 그를 외면하고 천대한 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분노를 값을 때를 기다리던 혁명가였을지모 모든다. 이러한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누가복음에 나오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온 여인을 향해서 죄인이라 한 것과 달리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들어온 여인을 향해서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이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녀는 당시의 주변인들, 소수자들만 초청된 식사 자리에 초청받지는 않았지라도, 여기에 참여한 자들은 그녀를 죄인 취급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행동은 이들의 급진적인 사고방식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가난한 자들을 돕자는 이들의 슬로건은 너무나 당연했고, 지고지순한 이상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창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고상한 이상은 도리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분의 더 깊은 이상과 실천력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죽음의 의미와 능력, 그 이후에 이들이 얻게 될 진정한 개혁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자신의 이상과 실천을 위한 도구로 인식하는 자들이 많다. 이들은 예수님보다 자신이 더 똑똑하고 더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이상을 지지하면 참 제자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던 예수님을 향해 환호하면서 호산나를 외치던 가난한 자들과 소외당한 자들이 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는 침묵했는지 알 수 없어한다. 왜 군중들이 살인자 바라바보다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친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유우러절 이틀 전에 일어난 이 잔치의 자리에서 명확하게 나타났다. 이들의 믿음은 자신의 신념을 믿는 믿음이었다. 이들의 신앙은 자신들의 신념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믿은 부유한 권력자, 가난한 혁명가 모두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자신의 신념을 믿지 않는, 아니 신념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의 어린아이와 같은 철없는 행동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설명하였다. 오늘 우리는 신념들의 세계에 살고 있다. 더 가치 있는 신념들을 경쟁하면서 산다. 그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이런 철없는 행동을 뭐라 설명할까? 바울의 말처럼 십자가는 어리석다. 십자가에는 어떤 신념과 고귀한 이상도, 돈과 권력도, 가난도 있지 않다. 오직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만이 매달려 계신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한 인간의 죽음에 몸이 타는 듯한 고통으로 울고 슬퍼하며, 그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하여 우울감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 때 까지 우울 해져야 한다. 그래서 이성이 아닌 우리의 전 존재가 그에게 나아가 그 죽음에 동참하여야 한다. 여인처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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