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
(마가복음 12:35–44)
서기관은 누구였을까? 앵커 바이블 사전에서 서기관에 대해서 해설한 Anthony J. Saldarini는 서기관은 단순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말한다.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할 뿐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성경 학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은 정부의 관료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서기관들은 어떤 가문이나 조직이 속하지 안았다. 그러므로 개인의 역량에 따라 정부의 관료로서, 마을의 리더로서 역할하였다. 하지만 살다리니는 이들의 필사를 볼 때,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학자들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들이 필사한 사본들에 오류가 많았다는 것이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서기관이 가르치는 역할을 점점 잠식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은 최고 리더는 아니지만 요즘의 언어로 비서실장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서기관들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정체를 조사하기 위해 중앙(예루살렘)에서 조사관으로 오기도 하였다.(막 3:22;7:1) 이것은 이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소속되어 있어다는 증거이다.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구원자)가 다윗의 자손에서 나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성경은 다윗의 자손에서 그리스도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틀린 것 처럼 질문하신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35) 그렇다면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틀린 것이 아닌데도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서기관들에 대한 비판과 과부의 헌금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는 단순히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참 주인, 왕이라고 말하신다. 다윗이 주인으로 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은 주인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자신이 주인인 것 처럼 행세하였다.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시장을 거닐 때는 지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으며, 식사 자리에서도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였다. 또한 서기관들은 자신이 지도자이며, 성경을 잘 아는 자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존경과 대접하는 마음을 이용하였다. 생계가 어려운 자들의 대접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과부의 대접까지 받아 챙겼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오래전 은퇴하신 목사님이 현직에서 가난한 집을 신방을 할 때, 목사가 대접받은 밥에 물을 말면 뒤에서 우는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원로 목사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 가난한 성도들이 목사를 위해 흰 쌀 밥을 무리해서 준비했는데, 이때 아이들과 식구들은 목사가 남긴 밥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는 밥을 다 먹거나 물이나 국을 말면 안 되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배우지 못한 자의 존경을 이용해서 가난한 자의 양식을 무의식적으로 빼앗는 서기관의 무감각한 양심을 비판하시는 것이다. 대접받는 것에 익숙한 자들은 이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결국 이들은 진짜 주인 앞에서도 주인 행세를 한다. 이들이 서기관들이었다.
그러면 주인을 향한 바른 덕(virtue)은 어떤 모습일까?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바른 태도는 어떤 모습일까? 그 모범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었다. 예수님은 헌금함 앞에 앉으시고 무리들의 헌금을 지켜보셨다. 성전에는 헌금함이 있었고, 여기에 사람들은 제물을 살 수 있는 코인들을 넣었다. 비둘기를 살 수 있는 코인, 양을 살 수 있는 코인 등 다양한 제물로 바꿀 수 있는 코인들이 성전에는 준비되어 있었다. 멀리서 오는 여행자들을 위해 서비스였던 것이다. 돈을 가져와 상인들에게 제물로 바꿀 수있는 코인으로 환전하여 헌금 함에 넣으면 이 코인을 다시 제물로 바꾸어 제사를 드리는 구조인 것이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는 수수료를 챙겼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헌금함에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 헌금과 성전을 위해 사용되는 헌금 등이 구분하여 함께 넣었다. 금, 은, 동 등의 다양한 동전들을 넣었는 데, 한 가난한 과부가 동으로 된 동전 두 개를 넣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은 이것이 이 과부의 생활비 전부라는 사실을 아셨고, 그 과부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며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44)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소유의 전부를 그의 것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를 보며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지 모른다. 다 드리면 먹을 것이 어디에서 나오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종에게 모든 의식주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히브리 사회에서 주인은 종을 자신의 소유물로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채무로 종이된 종이 채무를 노동으로 다 값으면 주인은 종을 보내 줘야 한다. 만약 종이 남아 있겠다고 하면 종은 그의 가족이 되었다. 종은 자신의 소유를 모두 주인의 소유로 돌리지만 종은 주인에게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모든 쓸 것을 공급받고 부족함이 없게 산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인이고 우리가 그분의 종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들은 어떤가. 이들은 예수님이 응당 받아야 할 존경과 영광을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챙기고, 예수님의 소유가 되어야 할 재물들을 자신의 것인 양 사용하고 누리었다. 사용자 편의를 위한 서비스라고 성전 제물을 손쉽게 드릴 수 있는 코인을 만들고 수수료를 챙기면서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였다. 더하여 이러한 편한 서비스는 제물을 기르고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과정 가운데 자신과 모든 소유의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묵상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과정을 손 쉽게 생략하게 만들었다. 결국 참 신앙을 오염되게 만든 것이다. 더하여 이들이 만든 최악의 종교 서비스 시스템을 이용하여 번 돈으로 남들보다 더 많은 양의 헌금을 한다고 의시대며 자랑하였다. 이들의 헌금은 남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양이지만 그들의 소유에 비교하면 부담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받아야 할 영광으로 더 많은 재물과 명예를 얻었으며, 이들은 가난한 이들의 것을 착취한 것만이 아니라 왕이시며 주인이신 예수님의 것을 도둑질한 강도였다. 이것들은 소위 지도자들이라 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당, 서기관들이 한 통속으로 만든 사회적이며 구조적인 범죄였다. 그러나 누구도 이것을 범죄라고 말하지 못하였다. 너무도 뿌리 깊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권위 있는 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으며, 주인과 왕으로 인정 받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들의 죄를 들어내어 참 권위자, 주인이 누구인지 세상에 공표하셨다. 이는 예루살렘의 모든 지도층을 결속시켰고, 이들은 평소에는 서로 좋아하지 않았을 지라도 자신들의 권위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여야만 했다.
오늘날에도 종교 권력과 세상의 지도자가 되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죽이는 일이 없다 누가 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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