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딤이 구원의 확신이다.
(마가복음 13장 1~13절)
우리는 질문한다. “누가 구원받을까요?” 예수님은 답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의 멸망, 이후에 있을 신자들의 고난, 그리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고난 받는 신자들의 구출이라는 시간적 순서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단지 물리적인 장소가 아닌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탈취하고 이를 왜곡하여 지은 인간의 권위의 성전으로 재해석한다면 더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앞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다의 지도층들과의 권위 논쟁이 진행되었고, 이를 마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성전을 나오신다. 성전을 나오면서 제자들은 성전에 사용된 돌들의 규모와 성전이 내뿜는 권위에 눌려 예수님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본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성전 건물의 돌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답하신다. 이는 중의적인 뜻으로 실제 성전의 파괴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성전에 의지하여 세운 인간의 권위의 파괴를 의미한다. 예수님을 대적한 지도층의 권위가 무너질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안드레는 예수님에게 은밀하게 예루살렘의 부패한 권력자들을 몰아낼 혁명의 시점이 언제인지 묻는다.(3,4) 혁명의 징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혹당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5). 5절을 해석하면 “어떤 사람이 정도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너희를 인도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Βλέπετε μή τις ὑμᾶς πλανήσῃ·”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6절에서 자세히 설명하신다. 그들은 스스로를 “내가 그라.”라고 말하는 자이다. 풀어 설명하면 그들은 “내가 그리스도이다.”, “내가 구원자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혁명의 징조는 구원자, 메시아가 나타났을 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끌어줄 지도자만 나타난다면 혁명을 일으키고 그들이 기대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꿈을 품고 있어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는 혁명의 시점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하신다. 이런 자들이 나타나면 이들을 따르지 말고 견디어라. 절대 그들을 따라 지금 가는 나아가는 그 방향을 의심하지 말아라. 그러나 곳곳에서 스스로 메시아(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따라 수많은 무리들이 혁명의 깃발을 일으킬 것이다. 이들은 자기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투쟁할 것이며,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들에게 결코 합류하면 안 된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당하고 각각의 정파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희생당할 것이다. 이들은 제자들에게 물을 것이다. 왜 우리의 거룩한 혁명에 참여하지 않는지 말이다. 이때 제자는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복음이며 구원자라고 말한다. 복음은 이렇게 세상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는 고난 받은 자들의 변론으로 전파될 것이다. 결국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13) 그러나 미움받는 만큼 신자들이 복음을 바르게 전할 기회는 늘어난다. 이로서 신자는 자신이 구원받은 자 임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다시 질문한다. “누가 구원받을까요?” 예수님은 답하신다. “끝까지 견지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신자는 신자의 모습으로 구원받은 자의 확신을 보여준다. 선전과 구호가 구원의 확신을 절대 보증하지 않는다. 견디는 자, 인내하는 자, 연단으로 증명하는 자 이들의 인내와 견딤이 구원의 확신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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