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
(마가복음 12:28-34)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두개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답이 적절하며 탁월하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의 답은 상대방의 악한 정치적 의도를 간파하여 상대가 더 이상 반론하지 못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또한 상대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해석으로 상대의 오류를 들어내고 성경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서기관들 중에 유일하게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질문하였다. 이 질문의 답은 부자 청년의 질문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나이까”의 답과 동일하였다. 그러나 서기관은 청년과 달리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의도로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서기관은 예수님의 탁월한 해석과 재치가 과연 어떠한 기초 위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간혹 뛰어난 재치와 수완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오래가지 못하고 밑천을 들어내는 경우들이 많다. 알고 보면 겉을 잘 포장하는 가벼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권위에 도전장을 내민 예수님을 향해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들 모두 예수님을 끌어내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런 불리한 상황 가운데 예수님은 홀로 싸우고 있었다. 이를 본 한 서기관은 속으로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 알고”라는 관전평을 하면서 예수님의 독특한 매력의 근원이 궁금하였다. 그는 묻는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2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29~31)
예수님의 두 답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하지만 서기관은 예수님이 두 가지 답을 세 가지로 나누어 해석하였다. 첫째,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둘째,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셋째,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 예수님은 이러한 서기관의 해석을 칭찬하셨지만 예수님의 답과 서기관의 해석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둘 다 십계명을 축약하여 핵심 원리를 설명하였지만 서기관은 십계명의 첫 계명인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를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유일신 개념으로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논리적 개념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믿어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이 이해는 당시 사회를 고려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만신전과 같은 수많은 신을 수용하는 로마의 지배 아래, 로마와 그리스의 신들이 물 밀듯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유일신을 믿는 유대는 매우 배타적이고 다루기 어려운 민족이었다. 이러한 종교적인 이유로 유대 지역은 여러번의 반란이 있었고, 급기야 로마는 종교에 있어서 자치를 허락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일신 개념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위한 선결 조건이라는 신념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관념적이고 학문적인 토론의 대상으로 점차 변질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하나라는 개념이 먼저 있고 이후에 사랑이라는 실천이 오는 것이 아니라 개념과 실천이 전체로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전체로 제물을 제사로 드리듯 말이다. 하나님은 이념이나 생각, 개념의 존재가 아니라 인격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 지금 서기관 앞에 서 있는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개념과 사랑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하나님이 전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서 믿어야 하거나 증명과 논증의 대상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사랑 자체이다.
서기관의 이해력에는 자신이 자라고 배운 배경의 한계 속에 갇혀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그를 칭찬하신 이유는 그는 적어도 무엇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선한 양심이 있었던 것이다. 성전의 제사, 회당의 가르침, 예루살렘 성에서 행해지는 정치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서기관의 양심은 자연스럽게 낮은 이웃에게 내려가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서기관의 마음은 이웃을 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었다. 그렇지만 그를 둘러싼 사회는 높은 곳을 향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이웃을 철저히 높은 곳에 있는 자로 한정시키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과 한탄이 있다. 이 한탄은 서기관이 예수님의 답을 세 개로 나눠 이해하였던 자기 한계 속에 있다. 하나님을 개념으로 아는 자와 하나님을 인격으로 사랑하는 자의 차이인 것이다. 사랑하는 유일한 하나님을 만나고나서,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할 자는 없다.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을 아는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이다.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 당신은 무엇이 먼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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