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새끼 위의 그리스도(마가복음 11장 1~11절)

나귀 새끼를 소재로 한 설교를 보면 나귀 새끼의 시점을 이용한 풍자적인 설교인 경우가 많다. 그 내용을 보면 나귀를 의인화 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에게 쏟아지는 환호성을 마치 자신을 향한 것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나귀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주의 하자는 것이다. 설득력 있고 좋은 교훈이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나귀를 이용하신 이유가 이런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것일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 본문에서 나귀 새끼는 보조적 장치가 아니라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는 중요한 장치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수님은 일부러 나귀 새끼를 준비하셔서 이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예수살렘을 여러 번 방문하셨다. 일반 성인이 예루살렘을 의무적으로 일 년에 2번 이상 방문했으니 공생애 3년 동안 최소한 4번 이상은 예루살렘에 오셨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전의 방문 때에는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신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 나귀 새끼를 이용한 것은 매우 특별 하였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신다. 그리고 이 설명은 나귀 새끼를 가지러 간 두 제자들이 처음 본 나귀 새끼를 바로 알아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2절)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란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 새끼를 의미한다. 이 나귀는 사람을 태워보지 않았기에 안장이나 여타 다른 장비가 구비되지 않은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한 이유로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나귀 등 위에 깔고 예수님을 태웠다(7절).
위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사람을 처음 태워본 뒤뚱 거리는 나귀 새끼와 안장도 없는 나귀 등에 타고 흔들거리는 건장한 젊은 청년의 모습. 이는 마치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나, 누군가를 조롱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겉옷을 깔아 예수님의 가는 길을 준비하고, 길 가의 들에서 급하게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나귀 새끼의 다리가 울퉁불퉁한 도로 상태 때문에 꺾기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군중들의 행동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가난한 자들의 최선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는 바리새인과 학식있는 자들, 권력자들, 중산층의 살만한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며 예수님을 향한 기대를 꺾었을 것이다.
더하여 이런 예수님의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도 환호하는 일부 사람들의 모습과 이들의 초라한 행세를 보면서 제자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부끄러움과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될 사람인가?"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나라가 바뀌고 자신들의 인생도 바뀔 수 있는 것인가?" 자문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기대했던 그런 인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고, 상당수는 예수님을 향한 기대를 꺾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하셨던 것일까?
답은 모두 알겠지만 매우 간단하다.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셔야 했다. 그리고 앞에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였듯 제자들도 죽어야 했다. 예수님을 따라 죽고 이들도 부활해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의인의 부활을 제자와 신자들에게 선물과 상으로 주시길 원하신다. 그러려면 자신을 향한 지금까지의 모든 기대를 꺾어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주신 모든 기적과 눈에 보이는 선물들은 진정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부활의 그림자 일 뿐이다. 루터의 표현으로는 ‘가면’이다. 만약 여기에 안주하면 부활은 없다. 하지만 제자들은 거기에 안주하고 누리면서 살기를 바라고 있다. 엘리야와 모세를 만난 변화산에서 초막을 짓고 살자는 이들의 모습, 누가 큰 자인지 경쟁하는 모습 등. 급기야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 스스로 조롱꺼리가 되기로 결심하신다. 그리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신다. 이로서 이들이 부활을 소망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부활을 소망할까? 아니면 지금 여기를 소망할까? 예수님이 자신을 조롱꺼리로 만들어 제자들이 헛된 기대감에 빠지지 않게 하였듯, 요즘 한국 땅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고 계시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에게 다른 복음을 기대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떠나게 만들고 계신 것은 아닐까? 오늘 날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나귀 새끼 위에 흔들리는 조롱 꺼리가 되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예수의 얼굴을 보며 부활을 발견한 자만 교회에 남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이 남은 자들은 예수를 따라 십자가에 함께 죽을 것이다. 세상을 위해, 예수를 따라서 말이다. 부활의 소망을 확신하며 죽는 자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내게 말씀하신다.
“흔들리는 나귀 새끼의 등 위에서 나와 함께 할 자가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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