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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마가복음

바디매오의 꿈(막10:46-52)

바디매오의 꿈(막10:46-52)
 
 

 

바디매오는 어떤 사람일까? 성경학자들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치료하신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두 명만 그 신분이 명확하다고 주장한다. 이 중에 첫째는 마가복음 5장 22절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고, 다음이 바디매오이다. 그렇지만 바디메오는 그의 진짜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바디매오란 아들이란 뜻의 ‘바’와 ‘디매오’의 함성어로서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에 의탁하여 사람들에게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거지였다. 아니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가족에게서 버려져서 아버지의 이름 디매오만 알고 있는 불쌍한 한 인간이었을 지 모른다. 무엇이 되었든 이같은 처지는 그로하여금 꿈을 가지기는 호사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럴듯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한 추측이지만 장애인 바디매오의 삶은 꿈이란 거창한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건 그가 평상시와 전혀 다른 이유로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의 외침이 아닌 무언가 다른 이유로 그는 목청을 높여 소리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군가 평상시에 하던 행동이 아닌 다른 행동을 할 때, 이를 이상하게 여긴다. 더하여 사회적인 계층 별로 용인 된 행동이 있는 데, 누군가 이를 너머서서 다른 계층의 영역으로 들어오려 할 때, 이를 용인하지 않는다. 바디매오의 행동은 이와 유사한 행동이었다. 문제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는 외침이었다. 이는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치료자가 아닌 영혼의 구원자, 왕, 메시아로 알고 있었다. 또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두 번의 외침은 51절에서 예수님이 그의 소원을 묻는 문장인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로 변형되어 다시 반복된다. 이어서 이것은 구체적인 소원의 내용으로 바뀌는 데, 맹인은 이렇게 답한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다시 이것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로 전환된다. 이 답은 마치 동문서답처럼 보이는데, 이 말의 결과로 맹인이 눈을 떠서 보게 된다. 보게 된 그는 예수님을 따른다.

 

 
이러한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사건들이 마치 새끼줄을 역듯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바디매오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 속에 있는 두 욕구가 모두 충족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바디매오와 불쌍하고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구출되길 절실하게 원하는 바디매오라는 한 인간의 외침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그와 다른 편에서 그런 그를 향하여 사회적인 편견과 그들만의 카르텔, 사회적 신분의 벽 너머에서 바디매오가 넘어오는 것을 막고자 하는 대중들이 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속 깊이 다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에게 답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믿음, 구원자 예수님에게 자신을 던지는 믿음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눈을 떴고, 사회적 편견을 너머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통해 영과 육의 감옥과 사회적 감옥에서 우리를 구출하시는 진정한 구원자이심을 보여주셨다. 바디매오의 꿈은 단순히 맹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감옥에서 벗어나 구원 받는 것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런 구원을 얻는 것이며, 그런 구원을 세상에 보이는 것이다. 구원은 한 사람과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사는 세계와 사회를 모두 담는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꿈꾸는 구원이다. 참 믿음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