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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마가복음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의 비밀 (마가복음 9장 14~29절)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의 비밀

(마가복음 9장 14~29절)

2019년 3월 21일 이춘성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서 내려오신다. 이때에 나머지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군중들은 이 모습을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다. 이 논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사람들의 시선은 예수님을 향한다. 이제 논쟁의 주체는 제자들에게서 선생님인 예수님에게로 옮겨 간다. 누구나 예상하듯이 선생님은 단숨에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이러한 선생과 제자들의 이야기의 구조는 전 세계 모든 경전과 교육과 관련된 역사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관경이다. 이 사건도 상투적인 이야기일까?


이 사건은 우리가 아는 선생과 제자 사이의 일반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 제자 됨을 가르치는 연속된 사건들 중의 한 부분이다. 제자도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예고에 뒤따라 나온다. 마가는 이를 일련의 시간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 데, 죽음과 부활의 첫 번째 예고와 그 뒤의 사건은 8장 27절~9장 29절, 두 번째 예고는 9장 30절~10장 31절, 세 번째 예고는 10장 32절~10장 52절이다. 이후의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 지와 부활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와 실현 이전에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양식(빵)으로 소개하셨으며 이를 증명하셨다는 것이다. 1장~8장까지, 예수님은 쉴세 없이 병든 자, 악한 영에게 고통 받는 자들을 고쳐주셨고, 굶주린 자들을 먹여주셨다. 그리고 복음을 설교(전도)하셨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 자신을 영과 육을 모두 먹이시는 참 목자로 소개하셨다. 이는 우리가 따라야할 분은 우리의 고통과 배고픔을 외면하고 고상한 영적 이야기만을 들려주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목자로서 우리를 풍성히 먹이시고 환대하신다. 이러한 확신과 안정 가운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으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고자 결심했을 때, 적어도 먹고 살 것, 휴식할 지붕, 병들고 약한 것을 치료받는 의료를 약속해 주셨다. 어부 베드로와 요한을 부르실 때를 생각 해 보라. 예수님은 이들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도록 해 주셨다. 하지만 이것이 제자도, 제자 됨의 전부가 아니었다.


리처드 마우는 최근에 출판된 그의 책 “Restless Faith”에서 번영복음에 대해서 조금 다른 시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우는 번영복음의 대표적인 인물인 로버트 슐러 목사에 대해서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가 실은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 인물이라고 소개하였다. 또한 개혁주의자라면 누구나 잘 아는 교의신학자 루이스 벌코프가 로버트 슐러 목사의 환대를 받으며 그의 교회에 잠시 머물며 그와 대화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벌코프는 마우에게 슐러 목사가 가르친 것은 기독교라는 우주 왕복선의 일 단 로켓이라고 말하였다. 일 단 로켓이 없이 우주 왕복선은 지상에서 이룩할 수 없다. 하지만 대기권을 벗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일 단 로켓이 분리되지 않으면 우주 왕복선은 결국 추락하고 만다. 이렇듯 벌코프는 번영은 기독교의 일 단 로켓이라고 로버트 슐러 목사에게 진지하게 충고하였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그는 벌코프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은 것 같다.


마우는 벌코프의 번영신학에 대한 조언과 비판을 통해서 복음주의자들의 안정과 부에 대한 이중적인 극단적 태도를 지적한다. 한쪽의 극단은 안정을 추구하는 중산층에 대해서 복음을 저버린 배신자와 믿음 없는 자로 비판하며, 다른 극단은 부와 권력이 믿음의 보상인 것처럼 자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우는 이 둘 모두 균형을 잃은 제자도라고 비판한다. 결국 복음주의는 균형을 잃고 중산층을 번영복음에 내어 주었다는 것이다. 아니면 복음주의가 번영복음화 되어 본래의 복음주의의 모습을 잃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복음주의가 추구하는 복음, 더 크게는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복음은 총체적이다. 안정과 풍성함 없이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고난과 비난이 있다. 이 둘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있어야 한다. 다만 어떤 상황 속에서 둘 중의 하나가 조금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뿐이다. 참 신자는 고난 속에서도 안정과 풍성함의 확신을 잃지 않으며, 안정 속에서도 고난과 죽음의 길을 묵상하고 찾는 자이다. 이것이 믿음이 견고한 신자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19절에서 제자들을 포함해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하며 한탄하신다. 왜 이들이 믿음이 없는 세대일까? 예수님이 한탄하시는 대상은 단지 제자들만이 아니다.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탄식이다. 지금 우리를 포함해서 말이다. 믿음 없는 세대의 단적인 모습을 우리는 아이의 아버지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22절에서 아버지는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이 간청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그러나 당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ἀλλʼ εἴ τι δύνῃ”이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바로 이어 그의 말을 인용하여 “당신이 할 수 있다면 Τὸ Εἰ δύνῃ”이라고 반복하신다. “Τὸ”는 앞의 말을 인용하기 위해 쓰는 정관사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의역하면 “지금 네가 ‘당신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면’이라고 말하였느냐?”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와 같은 이유로 만약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 πάντα δυνατὰ τῷ πιστεύοντι”를 번영복음이 약속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 “할 수 있어! I can do it”과 같은 요술 방망이 구호로 이해한다면 이는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된다는 맹목적인 종교적 신념으로 왜곡하여도 안 된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아이의 아버지를 꾸짖는다. 무엇이든 한 번 해보라는 그의 회의적인 태도를 향해 예수님은 믿는 자(신자)가 어떤 존재인지 설명하시는 것이다. 믿는 자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이다.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 해결사이든 그렇지 않고 고난과 비난, 그리고 죽음에 처하는 비참함 속에 있든지 관여하지 않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자가 믿는 자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인척 하면서 예수님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얻고자 하는 가짜 제자였다. 제자들에게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대전제며 선언이다. "모든 것"이라 인간의 욕망의 모든 것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이 가는 모든 걸음, 걸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가신 모든 길을 열려 있다는 것이다. 만약 선생이 가는 길을 제자가 쫓지 않는다면 그를 제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를 참 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 믿는 자, 참 제자들은 안정과 평화로운 길만이 아닌 고난과 죽음의 길도 따른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그의 믿음 없음에 탄식하면서 절규한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아이를 고쳐달라고 하지 않고 믿음 없는 자신을 도와 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두 마음으로 갈라져서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원함만을 얻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의 귀신에게 자신이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때마침 아이는 다시 귀신에 사로잡혀 심하게 경련을 일으킨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달려가 아이를 고쳐 주신다. 아이는 죽은 시체처럼 아무 반응이 없다.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자 아이는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서 일어난다. 귀신에게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은 아이 만이 아니었다. 믿음 없는 아이의 아버지도 그리고 그 곳에 있는 제자들과 군중들도, 또한 우리도 세상의 악한 영에게 사로 잡혀 믿음 없는 자들처럼 산다. 내가 따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나누어 적당히 제자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살아간다. 마치 자신이 작은 예수가 된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예수의 제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칭찬과 존경을 도적질하면서 위선의 길로 나아간다. 참 제자가 되는 길, 위선에 빠지지 않고 제자로서 사는 길은 무엇일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능력을 어떻게 하면 자신들도 할 수 있게 되는지 묻는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능력을 주시지 않고 다른 답을 주신다. 그 답은 병고치고 악귀를 쫓는 능력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 바로 전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르면서 위선에 빠지지 않는 비밀을 가르쳐 주신다. 이것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며, 단순한 원리인 기도이다. 무슨 다른 답이나 비법이 있을까? 참 제자도의 다른 비법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뭐 그리도 많은 방법들이 있는 것일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마가복음 9장 2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