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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마가복음

기도할수록 망하는 길(마가복음 11장12-21절)

기도하는 거짓 신자(마가복음 11장12-21절)


예루살렘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표현했을 때, 이는 용도와 도구(장소)가 결합되어 있다. 무화과나무도 이와 동일하다. 용도는 열매를 맺는 것이고, 잎과 가지는 열매를 담는 그릇(도구)이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하면 무화과나무라는 도구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또한 성전 정화 사건은 이 무화과나무 비유 사이에 끼어 있다. 무화과의 저주와 그 결과 사이에 성전 정화가 마치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고 뿌리째 마른 원인 것처럼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도 원래의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무화과나무처럼 될 것이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용도는 기도하는 곳이다. 기도가 이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성전은 존재 이유가 없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기도가 왕성하게 있었지만 문제는 옳은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진 기도는 각자의 욕망을 채우고자 의도로 가득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들의 기도를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욕망을 채우는 데 하나님을 이용하는 기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가득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이들은 이런 옳지 않은 기도를 하였을까? 그리고 스스로 이런 기도를 계속하여 멸망을 자처하는 것인가? 베드로는 자기도 모른 체 이 질문을 한다.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답하신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런 기도를 하는 자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기도, 곧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기도로 넘치는 장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장소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 신전과 다를 것이 없는 곳으로 변질하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에 들여질 참 기도가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는 기도이며, 산을 옮겨 바다에 던질 정도로 강력하다. 이는 바로 회개의 기도이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이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이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힌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이 회개의 기도는 자신의 죄만이 아닌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기도이다. 이는 산을 옮겨 바다에 넣는 것 같은 불가사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성전에서 회개하는 기도를 하는 자는 그런 능력을 소유한다. 우리가 잘 아는 손양원 목사님의 별명이 “사랑의 원자탄”이다. 이 별명은 교회에서 기도하는 모든 자들의 별명이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날 교회에서 드려지는 수많은 기도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기도인가? 용서와 화해가 있는 기도인가? 아니면 욕망으로 가득한 기도인가? 욕망 덩어리로 변질된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이를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라고 언제까지 변명할 수 있을까? 매일 회개하고 용서를 경험하는 자들에게서 변화는 이루어지고, 이로서 신자는 끊임없이 믿음 있음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