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공부하는 '식사'의 관점으로 정리해 본 기독교 윤리에 대한 글입니다.
희생의 윤리
(로마서 12~15장의 음식의 문제)
다수의 경우 로마서는 1~8, 9~11장 까지 설교되는 경우가 많다. 12장 이후 부분을 설교한다고 하여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거나, 조각조각 나누어 문맥과는 다르게 마치 잠언의 경구처럼 가르쳐지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다 보니 설교자나 선생의 사적인 경험이 사족이 아닌 몸통이 되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처럼 가르쳐지는 경우도 많다. 12장 이후의 내용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① 12장 1 ~ 13절: 기독교인의 일반적인 삶의 원리
② 12장 14절 ~ 3장 10절: 기독교인들의 세상 속의 삶
③ 13장 11절 ~ 15장 7절: 식사에 대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인들의 삶
바울은 이상의 부분에서 기독교 윤리의 최고점이 무엇이며 세상의 윤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좀 이야기 해 볼까 한다.
바울은 12장의 전반부의 일반원리를 기독교인의 세상 속의 삶과 교회 안의 삶에 동일하게 적용한다. 특별히 12장 이후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12장 1, 2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핵심 단어들이 있다.
첫째는 “산 제물”이다. 바울은 15장 16절에서 자신의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소명과 관련하여 ‘제물’이란 단어를 다시 사용한다.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와 신자의 소명이라는 것이다. 로마서를 받고 있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제물이 의미하는 것의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들어난다. 제물이란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 영적 예배란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몸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낼 때에 바르게 드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인적인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영적 예배이다.
둘째는 “이 세대”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세대’란 분명히 교회 밖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의 교회가 바라보는 세상은 로마 제국이었다. 더 좁게는 로마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의 특수한 환경이었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너무 넓게 적용해서 세상의 사조나 역사의 흐름과 같은 거대 담론을 주변 상황으로 적용하는 것은 바울이 의도하는 구체성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다. 바울이 염두하고 있는 ‘이 세대’가 의미하는 그 구체성은 무엇일까? 이는 13장 11절 ~15장 7절의 배경인 ‘식사’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그리스-로마의 식사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 세대’가 의미하는 구체성을 밝힐 수 없다.
셋째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다. 이는 이 세대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세대(식사의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 달리 말해 하나님의 윤리의 원리이며, 최고점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바울이 12장 이후를 쓰고 있는 의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12장의 1, 2절 단 두 절만을 분석해서 가르친다는 것은 내용은 옳은 가르침일 수 있지만 피상적이거나 성경을 벗어난 현대의 경험을 나열함으로 성경이 의도하는 것을 놓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13장 11절~15장 7절을 듬성듬성 해석해 보려 한다.
우선 당시의 식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리스-로마(그레코로만)문화에서는 모든 종교 행사, 철학자들의 모임, 수공업자들의 모임(길드), 상인들의 모임 등 각종 모임들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각각의 계층들의 모임을 결사(associaltion)라 부르는 데, 이들은 정기적으로 특별한 식사를 하였다. 이들은 해가 질 무렵부터 저녁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새벽까지 식사와 연회를 즐겼다. 이것은 일반 가정에서도 친구들을 초청하여 자주 즐겼던 당시의 일반적인 식사의 한 형태로서 영어로는 banquet이라고 하고 그리스어로는 데이프논(deipnon)이라 한다. 이러한 식사 문화는 음식을 먹는 식사와 술과 음악 춤, 토론 등으로 구성된 연회가 결합되어 있었다. 철학자들은 방탕한 연회를 격멸하기도 하였지만 일반에서는 본 식사가 끝나고 연회 때에는 창녀를 접대부로 들여서 즐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특별히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서 제기된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의 문제는 사실 고기 자체에 문제가 있기 보다는 고기를 공급하는 주체와 장소의 문제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 당시의 문화는 다양한 결사들의 식사 문화가 보편적이었다. 특별히 신전에서 제사로 드려진 고기는 신전에 속한 결사들의 지위에 따라서 분배되었고, 남은 것은 일반 평민들과 노예들에게도 분배되었다. 그리고 신전에는 제사 시설만이 아닌 연회 장소를 구비하여서 제사가 끝난 이후에 모여 제사 음식을 먹고 연회를 즐기는 식사 문화가 보편적이었다.
위와 같은 상황 속에서 신전의 고기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 이방 신에게 속한 한 공동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결사의 식사에는 술을 신에게 바치고 기도하는 헌주하는 행위가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수공업자들의 식사에는 자신들의 일을 돌봐주는 신에 대한 감사와 찬양, 기도를 하는 헌주의 시간이 이었던 것이다. 대다수의 사회적 모임에는 종교적 예식이 있었고, 이는 대부분이 이방 종교적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에 업무적인 이유로 기독교인이 이러한 장소에 참여하여 함께 식사하고 끝까지 참여한다면 이방 종교적인 예식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구분이 나온다. 믿음이 강한 자는 신이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에 그 외의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였다. 그러기에 이들은 제사에 쓰인 고기나 술에는 영적인 의미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이것들을 먹고 마시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이다(14:20). 하지만 믿음이 약한 자들은 제사의 음식을 먹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과 같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이들은 고기를 먹고 싶어도 이를 금하고 채소만 먹었다. 이들이 유대인 기독교인이든 그렇지 않은 초신자이든 관계없이, 바울은 이들을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고기의 문제 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고기를 먹는 문제는 핵심 문제의 한 현상일 뿐, 문제의 핵심은 당시 로마의 보편적인 식사 문화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식사에 참여하는 것은 이들의 경제, 사회생활과 생계가 걸린 문제였다. 결사의 모임에 나가 이들과 식사하고 연회를 하는 가운데 사회에 대한 여러 정보와 일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번듯한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최하층 노동자의 일 외에는 할 것이 없거나, 노예로 자신을 파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1세기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파는 일인 빈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의 도전 앞에서 믿음이 강한 자들은 스토아학파의 아디아포라의 원리를 들어 물질은 선하거나 악하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라는 원리를 적용하였다. 그리고 바울도 이 원리가 성경적으로 틀리지 않다고 인정하였다. 원리적으로 보면 세상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적인 존재 자체가 없기 때문에 로마의 신전에서 행해지는 의식과 연회와 식사에서 행해지는 신을 향한 헌주 또한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들의 모임에 참여하되 단지 일과 관련된 업무만 보고, 적당히 비유를 맞추며 고기와 음료를 즐기다 오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성경이 정하는 비윤리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연회에서 여자와 놀고 술을 과하게 마시는 행위 등은 플라톤이나 플루타르코스 같은 철학자들과 학식이 높은 자들에게 비판받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얼마든지 고상한 모임을 요구하고 즐기는 데 세상이 문제 삶을 이유가 없었다.
이와 달리 덜 계몽된 초신자들, 아직 이방종교의 영적인 영향력에 두려움을 느끼는 신자들은 여전히 이러한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부인하거나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여 두려워하였다. 이들에게는 구원의 능력과 기쁨을 상실하는 두려움보다 차라리 세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최하층의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이 더 안전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믿음이 강한 자들의 눈으로 보면 한심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생각을 바꾸고, 더 합리적으로 행동하면 그런 맹목적인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믿음이 약한 자들을 교육시켜 계몽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바울의 답은 합리적인 답이 아니었다. 바울은 아디아포라가 아닌 덕을 세우는(15:2) 것을 선택하였다. 덕을 세운다는 그리스어 oikodome는 집을 짓는다는 뜻이다. 이는 믿음이 약한 자가 설 수 있게 해 주라는 의미이다. 그 첫 단계는 상대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각각의 주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믿음이 약한 자들의 주인으로서 이들을 세우는 일 또한 하나님이 하신다. 이는 믿음이 강한 자들이 교육이나 계몽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14:4). 각자는 하나님의 종이며 소유물로서 신앙의 모습은 달라도 그 목적은 동일하다. 모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14:8). 믿음이 약한 자들도 이 원리에 따라 고기와 술을 거부하고 채소와 물만 마시고 있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본을 본받아 고기도 술도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14:21). 이 요구는 당시 로마 교회에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해 강한 자들이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불평도 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각자 자신의 옳은 확신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바울의 세 번째 요구로 이어진다. 세 번째 요구는 서로 덕을 세우라는 것이다(14:9). 바울은 상대를 세우는 것이 서로 세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 혼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이 범하는 실수이자 죄는 교만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는 홀로 있지만 동시에 교회 안에 있다. 그리하여 상대를 세움으로써 자신도 세워지는 놀라운 신비를 경험하는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형제를 세우는 것이 결국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한다(14:18).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믿음이 약한 자를 세우는 것은 믿음이 강한 자를 동시에 세우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는 단순한 도식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윤리의 최고점은 무엇일까? 합리적인 답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으며, 이를 인정하는 바울이 아디아포라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서로의 덕을 세우는 길을 선택하라고 하는 그 이유에 기독교 윤리의 최고점이 있다. 바로 희생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이 신자가 없듯이 서로의 희생이 없이는 교회와 기독교 윤리는 세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답이 분명하여도 만약 이 길이 서로 희생하지 않는 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가치를 세울 수 없는 윤리일 뿐이다. 그러나 상호 희생의 길은 더딜지 모르지만 분명하게 모든 신자들을 가장 합리적이며, 분명한 길 위에 바르게 세울 것이다. 이를 위해 로마의 신자들은 상당한 희생을 치렀다. 연약한 형제들을 위한 희생, 어쩌면 미련한 고난의 길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함께 걸어가 줬다. 그리스도께서 이들과 함께 해 주었듯 말이다. 더하여 이들이 함께 세워지는 길을 갈 수 있었던 또 다른 한 이유는 구원의 때, 종말의 때가 이제 가까이 왔기 때문이었다(13:11~14).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종말이 임박했다는 종말의 의식은 이들로 하여금 연약한 자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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