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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 일반

“존 하워드 요더” John Howard Yoder의 성 범죄

위대한 신학자의 뒷모습...

(“존 하워드 요더” John Howard Yoder의 성 범죄)

-이춘성-







기독교 평화주의의 기틀을 놓은 20세기 기독교 윤리의 최고 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의 성폭력과 추행에 대한 소문은 상당기간 동안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때마침 뉴욕 타임즈(1992년 8월22일) 등 미국 일간지들이 요더의 추문을 자세하게 다루었고 이는 사실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 실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들은 여전히 반전주의자,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요더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요더(1927-1997)가 사망한지 18년이 지난 2015년 봄 메노나이트 쿼터리 리뷰(The Mennonite Quarterly Review)는 모든 지면에 요더의 성 범죄에 대한 메노나이트 교단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 충격은 가히 핵폭탄 수준이었다. 그 중 요더의 성 추행, 폭행의 진행과 그 처리 과정을 다룬 74페이지 분량의 “야수의 송곳니 뽑기”Defanging the Beast는 충격 그 자체였다. 올 해 봄에 대장간 출판사에서는 이 저널 전체를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의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였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요더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던 한국의 신학계에서 이 사실은 요더의 책을 더 번역 출판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회의까지 불러오게 할 정도이다.

요더가 쓴 「예수의 정치학」은 기독교 윤리학의 역사 가운데 가장 강력한 획을 남긴 역작으로 평가 받는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이전의 창조론 중심의 윤리에서 기독론 중심의 윤리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예수의 정치학」은 요더의 성 범죄와 별개로 높게 평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저작과 작가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요더의 과오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그의 저작을 읽기 위한 공정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요더의 저작이 주는 유익과 그의 저작 가운데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며, 한 인간의 한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요더와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로 들어가 보자.

1. 요더의 성 범죄
“Defanging the Beast”: Mennonite Responses to John Howard Yoder’s Sexual Abuse는 요더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루기 위해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의 초청을 받은 Washburn University의 역사학 교수인 Rachel Waltner Goossen이 자료를 제공받아 연구한 결과물이다. 제3자의 공정한 시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직시하기 위한 뼈아픈 결정이었다. 이 글을 통해 안 사실은 요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에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우리로 하면 한국 장로교를 대표하는 박윤선, 박형용, 한경직, 한상동과 같은 인물이 요더였다. 이 때문에 요더는 메노나이트 교회가 결코 버릴 수 없었던 것이고,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결국 그의 말년에는 교회와 학교가 그를 복권시켰다. 하지만 이 때에도 요더는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변방의 주목받지 못하던 교단, 그러다 사라질지 모르던 교단을 세계 속에 주목받는 대안 공동체, 20세기 교회의 참 모습으로 변화시킨 것이 요더였다. 이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거의 20년 동안(70년 초~90년), 메노나이트 학교와 지도부는 요더의 문제를 비밀에 부쳤다. 그리고 피해를 호소하는 세계 각지의 여성들의 호소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니 요더의 문제는 개인의 부도덕을 넘어서 교단의 부조리가 일을 더 키운 것이었다.

요더의 성 폭력 피해자는 알려진 것만 100명이 넘는다. 그 이상이라는 것이 대부분이 공감하는 바이다.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그가 총장과 교수로 가르친 메노나이트 신학교인 고센 대학, 노틀담 대학과 관련이 있었다. 그의 범죄는 그가 채용한 파트타임 여학생 직원들과 그를 따르는 여학생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그가 강의 여행을 다닌 다른 나라의 학생들과 자신이 다니던 교회, 자신이 주도하는 컨퍼런스 회의장에서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2. 요더의 변명
이에 대해서 요더는 이것이 연구의 일환이었다고 변명하였다. 이 근거가 되는 미출판 문서로 요더는 Affective Resources for Singles, A Call for Aid라는 성 윤리에 대한 자신의 글을 사용하였다. 이 글을 통해 요더는 하나님 나라의 성 윤리는 성적인 관계없는 기쁨을 추구하는 독신자들의 삶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고린도전서 7장 29절을 근거로 삼아 결혼 초기부터 이런 설교를 하여왔다. 이후 예수 따름의 윤리를 주창하면서 예수님의 독신의 삶이 기독교인이 따라야할 표상이라는 주장을 줄 곳 하여 왔다.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요더는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했다는 것이다.

이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로 남성에 대한 거부감, 성 관계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여성을 대상으로 성적인 관계없이도 얼마든지 최고의 관계와 기쁨을 서로 나눌 수 있도록 하려면 성에 대해 터부(taboo)시하는 감정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요더는 자연스러운 성적인 접촉(직접적인 성관계가 없는, 사정을 하지 않는)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손을 잡는 것, 허벅지를 쓰다듬는 것, 성기를 엉덩이에 밀착시키는 것 등의 순서로 접촉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을 하기 전 요더는 꼭 자신이 쓴 위의 에세이를 읽히고 여자들에게 동의를 구하였다. 그리고 직접적인 거부표시를 하지 않으면 이를 허락의 표시로 여기고 이를 지속적으로 행했던 것이다.

요더는 이러한 성에 대한 거부 감정을 성에 대한 집착의 역기능적인 감정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야수의 송곳니인 성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직접적이 성 행위(사정)가 없어도 자연스런 신체 접촉으로도 그에 상응하는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요더는 친근한 혹은 가족적인 성적 기능(“familiar” or “familial” sexuality)을 가르치기 원했다고 주장하였다(다른 곳에서는 “non-genital”, “non-erotic”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요더는 이러한 시도를 바로 “야수의 송곳니 뽑기”라고 불렀다. 또한 이에 동원된 여인들을 “자매 공동체”(sister community)로 칭했다. 하지만 상당수 이런 시도는 직접적인 성 관계로 발전했다.

대부분의 피해 여성들은 이러한 요더의 시도와 행동이 성경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요더가 지니는 메노나이트 교회 공동체와 학교 안에서의 위상과 권력 때문에 이를 직접적으로 거부하지 못했다. 또한 학교와 교회도 그의 위상을 이용하기 위해 이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 했으며, 당시 고센 대학의 총장이었던 요더의 친구이자 요더를 지적 멘토로 여기고 있었던 밀러(Daniel Miller)는 요더의 범죄를 덮고자 피해 여성에게 해고하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조용히 요더를 치료하고자 했던 그의 왜곡된 선한 의도는 변하지 않는 요더로 인하여 결코 성공하지 못하였다.

3. 요더의 성 범죄의 특성
요더의 성 범죄의 특성은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그의 왜곡된 성경 해석과 그의 신학적 이상주의를 꼽을 수 있다.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에서 서술한 예수 중심적 기독교 윤리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인간 윤리의 표상으로 삶는 것이 그 특징이다. 바로 이것이 급진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룰 수 없는 허상, 혹은 이상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신인(God-Human)이시지 단순한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착각한 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요더는 그대로 답습하였다. 예수님은 우리가 따를 윤리적 표상이 아니라 구원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순종해야할 윤리이지만 예수님의 삶 자체가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삶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삶은 신인의 구원자로서의 삶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가르치실 때, 신자의 윤리에 현실과 천국을 구분하여 가르치셨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는 신비의 삶을 구분하여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그분의 행동, 삶의 스타일 모두를 인간 윤리의 표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주장인 것이다.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더는 피해 여성들에게 신과 같은 권력을 휘둘렀다. 자신이 제시하는 것이 예수님의 윤리라고 말함으로 마치 이단이나 근본주의자들의 성경해석처럼 터무니없는 요구를 수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결국 요더는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그 이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다.

둘째는 자기 합리화이다. “야수의 송곳니 뽑기” 프로젝트는 선한 의도를 가장한 자기 합리화의 전형적인 예이다. 타인을 돕고자 하는 의도, 명시적으로 거부하면 다시 시도하지 않는 태도, 논리적 이론 등 이 모든 것이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요더는 끝까지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셋째는 주변의 방조 및 조력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밀러 총장이었고, 요더의 누나와 매형이었다. 요더를 아끼던 밀러는 요더의 가정을 지키기 위한 것, 요더의 세계적 명성을 통해 얻은 학교의 위상과 명성을 지키기 위한 것, 교단을 보호하기 위한 것 등의 명분을 위해 피해자들의 편지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외면하였다. 누나와 매형은 동생을 위한 명분으로 메노나이트 교단 안에서 요더의 문제가 퍼지지 않도록 교단 주요 관계자들을 움직였다. 더 충격적이 사실은 요더의 부인이 남편의 부정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인이 나서서 더 적극적으로 요더의 부정을 덮는 데 일조 했다. 결혼을 유지하고 세상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왜곡된 사랑이었다.

넷째는 요더가 피해 여성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더는 자신의 행동으로 의도치 않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 있다면 이에 사과하겠지만, 의도적인 상처를 주지 않았다는 입장을 평생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릇된 신학적 확신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4. 권력과 성 범죄
미국의 정치가인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권력은 궁극적으로 최음제다”라고 하였다. 이는 권력과 성과의 밀착성을 경고하는 말이다. 어떤 권력이든 결국 성적인 방종과 연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와 학문적 권력의 최상위에 있었던 하워드 요더는 자신의 소중한 이론과 교회를 위한 권력을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사용했다. 이를 통해 타인을 착취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기독교 평화주의를 통해 전쟁을 비난하고 비폭력을 주장했지만 정작 그 스스로는 주변의 작은 자들을 폭력으로 무참히 짓밟았다는 것이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여인들이 피해를 입었고, 이들은 교단을 떠나거나, 교회와 신앙을 떠난 이들도 많다. 지금도 이들은 피해를 호소한다.

하지만 이러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한 집단의 조력이 결국 더 큰 피해를 낳았다는 점을 필히 기억해야 한다. 이제 와서 요더가 성중독의 정신병이었거나 당시에는 진단할 수 없었던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s syndrome)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일련의 행동은 매우 계획적인 포식자적 유형이라는 점을 볼 때, 이런 변명은 궁색할 뿐이다. 지금이라도 메노나이트 교회가 이를 공개하고 자정의 노력을 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공개가 이들의 지금까지의 과오를 정당하게 해 주지는 않는다. 고센대학의 총장이었던 밀러는 요더의 성범죄를 알린 피해 여성들의 편지를 의도적으로 태워 은폐했고, 지금도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는 요더에 대해 조사한 대부분의 자료를 2047년까지 비공개로 해 놓은 상태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높다.

요즘 주변에 메노나이트 공동체가 지니는 평등한 공동체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신자들이 많다. 마치 교회의 직제를 없애면 평등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교회 안에서 상호 존중을 말하지 평등주의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요더의 경우처럼 평등은 오히려 탁월한 한 사람에게 체계가 견제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막강한 권력을 암묵적으로 용인하게 한다. 그 폐해는 더 심하며, 더 조직적인 은폐로 이어진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권력 지향적이며, 권력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전은 없으며 이를 지향해서도 안 된다. 다만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화의 은혜를 기다리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들 지만 실패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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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3일 작성
어제는 하루 종일 자료를 찾고 읽는 시간이었다. 특별히 기독교 평화주의의 기틀을 놓은 20세기 기독교 윤리의 최고 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의 성폭력과 추행에 대한 자료를 읽었다. 그 중 요더의 성 추행, 폭행의 진행 과정과 그 처리를 다룬 74페이지 분량의 “야수의 송곳니 뽑기”Defanging the Beast는 충격 그 자체이다. 올 해 봄에 출판사 대장간에서는 이 메노나이트 리뷰 저널 전체를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의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였다. 하지만 번역이 워낙 조잡해서 읽기 힘들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번역자는 요더의 책을 번역해 온 번역자이며, 한국 메노나이트 사역자이지만 언제나 번역의 문제를 지적받아왔다. 대장간은 사회 윤리적인 중요한 책을 많이 번역하지만 독자를 향한 출판 윤리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중요한 책을 이런 식으로 사장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러한 이유로 번역서를 읽지 못하고 어제 하루 종일 Defanging the Beast를 읽었다. 읽고 쓴 글을 아래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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