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통해 ‘소명’을 다시 생각해 본다.
(Mk 16:14–20)
예수님의 부활 후의 모습은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특히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부활 직후 보이신 여인들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로부터 예수님의 부할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도 예루살렘 모처에 모여 두려움 가운데 대책을 논의하고 있던 제자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달리 마태복음은 갈릴리로 가라 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갈릴리로 간 제자들과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사건과 갈릴리 사건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 후에 제자들과 이 땅에 머문 시간은 약 40일 이다(행 1:3). 그동안의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복음서의 공통된 서술 방식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의 40일이라는 긴 간극보다는 이 두 사건이 거의 연이어 벌어진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활과 승천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논리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해야할 일을 다 마치셨고, 더이상 이 세상에서 그분이 하실 일은 없고 미련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마가복음 16장 마지막 단락도 그렇다. 부활하시고 바로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리신 후에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 지사”(19)로 이러지는 구조는 실제로는 40일이라는 간극이 있음에도 즉시 급하게 일어난 일처럼 독자로 하여금 급박함을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기차 시간에 임박하여 역에 도착하여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당부하는 여행자의 모습처럼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여러 할 말이 있을 지라도 시간이 없을 때, 종종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아 이것만은 기억하렴.” 분명하게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매우 가깝게 기록함으로써 이러한 효과를 후대의 신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머물면서 제자들에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일하게 한 가지 가르침만을 반복하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부활 직후의 모습을 가장 자세히 기록한 요한복음 20장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마지막 기록인 사도행전 1장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8)고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다. 이를 통해서 부활 후 예수님이 40일 동안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다. 첫째는 제자(사도)들의 앞으로의 소명이며, 둘째는 이들에 의해서 제자가 된 자들, 즉 모든 믿는 신자들의 소명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딱 둘로 가를 수는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소명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량을 따지자면 예수님의 자신의 소명에 대한 가르침이 주를 이루었다. 예수님이 앞으로 하셔야 할 구원의 성취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가르치는 일을 자로 하셨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는 유일하게 제자들의 소명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부활 후의 가르침이 한 방향, 즉 신자들의 소명에만 집중한 이유는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 아니다. 이와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구원의 의미는 더 이상 설명하고 가르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믿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 자체라는 것이다. 믿음은 소위 이성의 작용, 이해의 작용이라는 착각이 있다. 아니면 변하지 않는 신실함, 진실함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혹은 감정적 확신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것들은 모두 믿음에 따른 부수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4장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1항은 “믿음의 은혜는 택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영혼 구원에 이르도록 믿게 해 주는 것이다. 그 은혜는, 그들의 심령 속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로서, 일반적으로는 말씀 사역으로 말미암아 임하는 것이고, 그 은혜의 증가와 강화도 역시 말씀 사역으로 되고, 성례와 기도로 말미암아 되기도 한다. ”고 기록한다. 먼저 믿음은 은혜라는 것이다. 은혜라는 말은 받는 사람 안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밖에서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적인 확신이나, 이해, 이성, 감정도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은혜는 성령의 역사이다. 이는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의 사역과 이어진다.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마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신비는 성령은 단순한 정보로 들리는 말씀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것과 동일한 경험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성령은 말씀을 단순한 언어 정보가 아니라 마치 눈으로 보고 만지는 듯한 실제 경험으로 이끌어 좁은 방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은혜로 얻는 제자들과 동일한 믿음으로 들어가게 해 주신다. 결론으로 믿음은 만남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며, 이 자체로 결코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이 우리 안에 자리잡는다.
이러한 믿음은 믿음의 근거인 십자가와 부활이 이루신 구원의 성취 안에 신자들을 안주하지 않도록 만든다. 이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확신을 자꾸 확인하는 의심의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믿음을 은혜로 얻은 신자들은 소명에 집중한다. 소명을 자신의 삶의 가장 중요하는 이유로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삶을 가치 있게 생각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소명에 따르는 삶을 살 때, 믿는 자들의 표적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신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퇴마의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가 종교 사회였다는 것, 신들의 사회였다는 것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정신과 사상들은 각종 신들의 형상으로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일종의 문화 사회적 코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잘못된 세계관과 의식들 에서 사람들을 풀어주고 자유롭게 해 줄 것이라는 말이다. 초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귀신의 지배 아래 있는 조선의 민중들을 보았다. 제사와 각종 미신에 사로 잡혀 지배자들의 착취에서 벗어나더라도 자기들끼리 서로를 착취하는 구조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이것에서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지금도 세상을 지배하는 거짓 신념들이 귀신의 가면에서 세련된 과학의 가면으로 바꾸어서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들을 현대의 귀신으로부터 구출하고 있는가?
“새 방언을 말하며” 믿는 자들의 표적인 새 방언은 흔히들 말하는 이상한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것은 새로운 언어, 즉 타인의 언어, 타국어 등의 의미이다. 과거에는 지역과 인종이 언어를 구분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은 언어가 지역과 인종을 구분하고 구성한다. 바벨탑 사건이 보여준 것과 같이 말이다. 풀러 신학교의 아모스 융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일어난 “난 곳 방언”으로 복음을 전한 제자들의 사건은 복음에는 인종과 지역 등의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복음적 환대의 사건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렇듯 믿는 자들은 좁게는 가정의 언어, 지방의 언어, 더 나아가 민족의 언어, 또한 모든 차별의 언어의 장벽을 너머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익히며 함께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너와 다르기 때문에 네가 나를 배우기 전까지는 난 너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태도는 새 방언을 말하는 신자의 표지와는 거리가 있다. 새 방언이란 내 집안에 들어오는 자들을 환대하는 소극적인 환대에서 도움이 필요한 자를 찾아가는 적극적인 환대를 의미한다. 복음은 이런 적극적인 환대를 실천해야 하는 모든 인간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마치 인간의 가장 기본권인 생명권과 동일하다. 만약 누군가 생명을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할 때, 이를 거절한다면 그가 설령 적극적으로 상대를 죽일 의사가 없다 할지라도 그는 살인이나 다를 것이 없다. 죽음을 방조한 것을 살인죄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새 방언이란 신자의 권리라기보다는 의무이다. 복음을 요구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들의 권리에 대해 응답해야 하는 신자의 의무라는 것이다.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이 표적은 사도행전 28장에서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압송되던 중에 바다에서 일어난 일을 떠올리게 한다. 풍랑으로 길을 잃은 배는 13일 동안 표류하였고 마실 물과 음식을 아끼기 위해 군인들을 제외한 죄수들은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죄수였던 바울은 동요하는 선원들과 군인들을 격려하고 죄인들을 먹이면서 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로마에 보내어하실 일이 있으니, 이 때문에 모두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하였다. 마치 예수님처럼 부족한 음식을 축사하고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어 배불리 먹게 하고, 육지로 배를 이끈다. 결국 한 사람도 죽지 않고 276명 모두 안전하게 육지에 도착하였다. 또한 섬에서 독사에 물리지만 바울은 소명을 받은 자는 소명을 이루기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듯, 독사를 벌래 다루듯 털어 버리고 산다. 이것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바울만의 특별함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이 지니는 표적이었다. 믿고 소명에 따라 살아가는 자들은 그 소명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지만 그 소명 때문에 고난에서 하나님이 그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안정감, 평안이 있다. 풍랑에 소스라치며 놀라는 제자들과 달리 소명이 분명하셨던 예수님은 배 밑에서 태연하게 평안히 주무셨던 것과 같이 말이다. 세상은 언제나 어수선하고 우리의 안정을 위협하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지나가다 가스관이 터져서, 아이를 만나러 가는 어머니가 탄 지하철에서 화재가 나서, 아래층에서 일어난 화재를 피하려던 여고생을 정신병자가 칼로 살인하여서, 알 수 없는 사고들과 고난이 아무렇지도 않은 평온한 삶을 송두리째 흔든다. 그러나 신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는다. 그리고 소명을 다 마친 후에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부활을 소망하였던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다 이루었다”하며 죽을 받아들일 줄 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마지막으로 신자의 표적은 사람들의 병을 고친다.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한 것처럼, 신자들의 기도와 손은 병든 자들을 위로하고 이들을 회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들의 더 깊은 병인 죄에 매여 있는 병을 낫게 해 준다. 예수님은 죄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병든 자라고 하였다. 이들을 위해 의사로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셨다. 신자의 소명도 예수님의 소명처럼 이들을 치료하고 죄의 병에서 낫게 하는 것이다. 이들을 찾아가고 이들의 죄의 육체에 손을 얹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라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거짓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모든 장벽을 허물고, 참 안정을 보이고, 죄의 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손을 얹는 것, 이것들이 신자들에게 주어진 소명인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표적이다. 이를 통해 이들이 전하는 말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세상이 알게 된다. 이를 당부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나아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20) 당신에게는 소명의 표적이 나타나고 있는가?
끝으로 소명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직업 소명이라는 말이 있다. 직업이 소명이라는 의미인데, 말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직업이 소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소명은 너무나도 구체적이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 성경은 다른 것을 소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예수님은 유일한 소명인 구원의 일을 위해 목수라는 직업을 버리셨고, 가장이라는 역할도 버리셨다. 직업과 가정의 역할, 교회의 직분, 사회적인 공적인 임무 등을 소명이라는 단어로 루터가 사용했지만 이것은 그 자체가 소명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주신 소명의 일을 하기 위한 역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역할이란 바뀔 수도 있다. 소명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소명은 바뀌지 않는다. 소명에 가장 적합한 역할을 할 때, 그 역할과 소명을 구분하기 힘들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 자체가 소명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할에 빠져서 그 역할이 소명을 수행할 수 없는 데도 이를 알지 못하고 계속한다면 역할은 소명을 파괴한다. 예를 들어 군인이라는 역할을 통해 어떤 사람이 소명을 충실히 드러내고 그 역할에 만족한다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독일의 나치의 군인이 되어 군인으로서 전쟁이 충실히 임하는 것, 유대인 수용소에서 충실히 일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소명에 충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소명과 직업 등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 소명을 분명하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언제나 우리는 소명에 따라서 직업과 역할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위의 4가지 표적인 우리의 소명 수행 과정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지 항상 자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소명이라는 이름으로 거짓과 죄를 정당화하는 심각한 죄에 빠질 것이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죄를 묵인하고 죄에 동참할 것이다.
'기독교 윤리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LGBT의 산업 (0) | 2019.05.01 |
---|---|
성 윤리를 다시 생각한다. (0) | 2019.04.30 |
교회는 왜 사회 정의에 무관심한가? : 종교사회학적 관점 (0) | 2019.04.17 |
“존 하워드 요더” John Howard Yoder의 성 범죄 (0) | 2019.01.14 |
회의의 윤리 (0) | 2019.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