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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탐한 국가, 국가를 탐한 종교

 

좀 늦었지만 캐버너의 책 “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에 대한 간소한 소감을 남긴다. 이 책은 요즘 한국의 보수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지난 시간 루터나 칼빈의 두 왕국론에 대한 구원론적인 이해, 문화론적 이해는 실로 두 왕국이라는 단어가 주는 정치적 함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최근 이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해석과 이해를 글로 남긴 일이 있었다. 정치는 종교를 탐하고 종교는 정치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와 정치가 결탁하는 순간 참혹한 결과를 낳는다고 나는 지적 하였다. 

캐버너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루터가 두 왕국론을 주장했고, 이것은 이전의 로마카톨릭의 교황제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국가가 신체적 구속력을 소유하고 교회가 도덕적 권위를 지니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설멸한다. 캐버너는 이에 더 나아가 유럽의 종교 전쟁에 대해서 이것이 종교를 앞에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종교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세속 권력이 종교를 빌미로 도덕적 우위를 내세워 그들의 권력욕을 체운 세속적 전쟁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부터 세속화는 시작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수도적이라는 의미의 religio에서 나온 종교religion의 탄생은 그 원 의미에서와 같이 유패되고, 사적인 의미의 기독교를 만들었다). 상당히 일리있는 분석이다. 

종교의 도덕적 우위성을 탐하는 세속권력은 결국 국가의 탄생과 함께 이 모든 권력을 소유하게 되어 신적인 권위를 소유한 일종의 종교가 되었다. 교회는 사사화되어 공적인 영역에서 축출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축출 과정이 잘못 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가 일종의 신이 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는 절대적인 권력이 되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폭군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중세의 교회와 교황의 세속적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막고 정부나 국가의 기능을 바르게 수행하게 하기 위해 더욱 교회는 공적인 영역에서 기능해야 한다는 거이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공적인 영역에서의 교회의 역할은 세속의 권력과 종교적인 권력을 동시에 소유했던 중세의 교황이 아니라 루터의 두 왕국의 교회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이지만 개신교적 문화와 정치관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특이점이자, 로마 가톨릭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대안이 성찬이라는 점이다. 성찬의 의미와 성찬을 나누는 것을 통해 윤리적인 실천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 사람의 유의미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은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성찬에서 영적 임재를 믿는 나에게도 성찬을 통한 신비적인 체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보편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지에 의문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성찬의 보편성, 그러니까 사회적 계층과 성별을 파괴하는 보편성이 이루어지는 성찬은 이를 시행하는 교회 안에서부터 세속과는 다른 평등과 정의, 사랑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이는 세상을 향한 다른 윤리적 실천과 삶을 경험하는 유일한 시작점일 것이다. 그 불씨가 시작이라는 점에서 나 또한 캐버너의 생각에 동의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일독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미국적 상황이 아닌 한국적 상황에서의 그와 같은 분석이 나오길 기대한다. 난 이 책을 읽고 캐버너의 책을 거의 다 구입하였다. 이제 바다 너머에서 소포가 오면 읽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