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소작인”
소작농 제도는 불법이다. 그럼에도 농지를 소작하는 일은 농촌에서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농지를 소작하는 것이 여전히 조선시대 처럼 부담이 되거나 부당한 착취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농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대신 농사를 지어줄 사람을 찾는 경우도 많다. 이 사회가 더이상 농업이 중심인 사회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이 시대의 소작인들은 도시에 몰려 있다. 산업의 핵심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택과 관련하여 무리한 대출을 받아 집을 구입하여 은행에 이자를 갚고, 자녀 사교육에 나머지 돈을 쏟아 붙는 도시의 현대인들, 그리고 전월세로 임대료를 꼬박꼬박 상납하며 내집 마련의 이룰 수 없는 신기루를 잡으려는 자들, 이들이 바로 이 시대의 소작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톨스토이의 단편선에 나오는 소작인들의 불행한 삶, 성경에 나오는 소작인들을 착취하는 부자와 귀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책은 여전히 현대 도시에도 유효하다.
요즘에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은 상대적으로 지주의 삶을 살아온 어떤 사람이 소작인들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나섰는 데,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소작인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한 삶이 아니라 합법적인 지주의 삶을 즐겨 왔다는 것이다. 그의 ‘이해’라는 것이 단지 논리적이고 이상적인 이론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그만의 모습이겠는가! 누구든지 그 위치에서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니 말이다. 이런 소작인의 구조 가운데에서는 세상은 진보하는 것 처럼 보여도, 실상은 형태만 바꿀 뿐 달라지지 않는다.
진정한 성육신이란 탐욕의 죄 속에 있는 모든 인류에게는 불가능한 신기루일 것이다. 그래도 난 성육신의 신비를 믿어 보련다.
키리에 엘레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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