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슈

“내어 던지기-지켜보기”를 통해 언약의 자녀를 양육하자.

“내어 던지기-지켜보기”를 통해 언약의 자녀를 양육하자.

-2019년 2월 10일 영유아부 부모와의 대화: 출애굽기 2장1~4절- 

(작성일: 2019년 2월 9일; 작성자: 이춘성)



아이를 키우다보면 아이가 내 소유라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된다. 막대한 재정과 노력 없이 아이를 키우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부모들은 자신의 노력과 희생이 자녀 양육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이 지나치면 하나의 편집증적 집착의 단계에 이르기도 한다. 다수의 부모들이 약간의 집착을 경험한다. 그러나 모든 아이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방식으로 키우신다. 이러한 이유로 신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녀 양육의 최고의 덕목은 소유의식이나 책임감, 혹은 좋은 의미로 쓰는 청지기 의식보다도 “내어 던지기”와 “지켜보기”이다. 이는 매우 어려운 과정이지만 가장 신앙적인 기초 과정이다. 


1. 내어 던지기

겉으로 보면 무책임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자녀를 자기에게 내어 던질 것을 요구하신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자녀를 내어 던지는 것은 허공에 던지는 것과 같은 두려움을 만든다. 이것은 마치 세상의 광야에 나의 자녀를 던지는 것과 같아서 자녀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 같은 죄책감을 가지도록 하며, 무책임한 부모라는 자책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내어 던지기”를 통해 신자는 하나님의 강력한 보호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행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부모란 결코 아이를 내어 던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 모세를 내어던진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경우처럼 부모의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중요한 양육의 조건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신뢰는 자녀의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 자녀들을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하는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의 존재와 가치를 깨닫게 하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자녀를 내어던지지 못한다면 우린 스스로 자신에게 하나님은 부차적인 존재라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다. 동시에 부모의 권위는 자신들의 옅은 믿음만큼이나 옅고 얇아진다. 본래부터 인간의 권위란 하나님의 권위에 의존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권위는 그 스스로 설 수 없다. 현대에 새로운 권위, 무한한 자유 위에 세우고자 하는 권위가 자꾸 부도덕함이라는 이유로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이란 절대자를 부정하면서 세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의 부모들은 자녀 양육을 통해 신앙의 밑바닥을 경험할 것이다. 더욱더 권위의 원천인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만약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그는 양육과 신앙에 영적인 큰 문제가 분명히 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만이 자녀를 내어 던지며, 우리 자녀를 자유로운 존재로 성장하게 만든다.


2. 지켜보기: “거리두기-지속적인 돌봄”

내어 던지기의 과정을 지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켜보기”이다. 던지는 행위는 일회적으로 결단하고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 그대로 내버려 두고 지켜보는 것은 긴 인내가 필요하다. 이것은 적절한 ‘거리두기와 지속적인 돌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거리를 두지만 돌봄을 포기하지 않는 행위, 이것이 자녀를 성장시킨다. 어쩌면 하나님이 신자 부모들에게 요구하는 가장 큰 덕목이 이 “거리두기-지속적인 돌봄”일 것이다.

우리 양육의 목표는 자녀들을 모세로 키우는 것이다. 모세의 이름은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홍해의 물(혼돈)에서 건져내어 이들을 하나님에게로 이끌었다. 혼돈의 시대에 많은 이들을 하나님에게 이끌 자로 자녀들을 키우는 것이 우리의 양육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부모들은 자녀에게 교육(공부)을 왜 시키고 있는지 분명한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취학 이전의 아동, 2~3살의 아동들로 부터 시작한다. 이런 모든 교육의 목적은 하나의 방향을 향하는 데, 바로 대학 진학과 취업이다. 직업을 찾는 것이 교육의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은 무엇을 읽힐 것인가에 있다. 


3. 교육의 목적: “무엇을 읽힐 것인가.”

언어, 수학은 가장 기초적인 공부이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고 그 중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초 공부는 원래부터 경전(Bible)을 읽히기 위한 공부였다. 경전읽기란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가치공부를 말한다. 현대의 학교 교육은 가치를 읽히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단지 직업을 결정하기 위한 기능적 지식을 가르친다. 그래서 포드 자동차 회사를 만든 헨리 포드 Henry Ford는 직장을 현대인의 성전(Temple)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경전(Bible)은 공장의 매뉴얼과 설계도인 것이다. 이러한 공부도 의미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공부는 가치를 읽는 공부가 선행 되어야 한다. 바로 성경과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읽히고 더 깊은 곳에 있는 성경적 세계관을 습득시켜 각각의 직업에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가치관이 없는 의사나 공학자, 사업가, 교사 등의 다양한 직업인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편리해지겠지만 소수에게만 유익이 돌아가는 불평등은 더해질 것이고 그런 사회에서 우리의 자녀들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든 그 아래에 있든지 신자로서 고통당할 것이다. 현재 공교육은 물론 기독교 사교육(미션스쿨)도 이런 가슴 없는 사람들(씨 에스 루이스 C. S. Lewis의 표현)을 다량으로 양성하고 있다. 이제라도 기독교인 부모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읽힐 것인지 결정하고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맞는 동화책과 영상, 교육자료들을 찾아 공유해야 한다. 단순히 자녀들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교에 맡겨두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4. 새로운 학교: 양육 공동체

마지막으로 이를 위해 “내어 던지기-지켜보기”를 위한 교회 안에 소규모의 양육 공동체를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한다. 이는 일종의 공동육아의 한 형태로서 부모들이 함께 육아에 참여하여서 함께 교육하는 것이다. 나만의 자녀가 아닌 우리의 자녀로 키우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만의 자녀가 아닌 교회의 언약의 자녀로 키우길 부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 키우시는지를 보는 기적의 손길을 경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