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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교회개혁은 어디에서 부터(윤리적 교회?)

교회개혁은 어디에서 부터
-“초월과 진리,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춘성)


한국교회의 위기는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 위기라고 말한다. 지난 겨울 한 수련회에 참석 했을 때, 한국교회의 위기를 주제로 한 3명의 전문가가 나와 발제를 하고, 토론 했다. 그 중 두 명이 한국교회가 위기를 극복하기위해 윤리적 실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중 한 명은 이제 전도에 대한 다른 접근 방법으로 각 지역에 있는 시민단체와 연대할 것을 주문하였다. 참신하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것이 바른 해결책이며, 문제의 본질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일었다.

이보다 앞선 작년 말, 소위 개혁적이라는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교회는 민주적 절차가 중요시되는 교회였다. 장로가 있었지만 교회의 운영은 운영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운영위원회의 위원장은 30대의 젊은 여성이었다. 문제는 이런 구성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요 핵심사항의 결정이 신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표결이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된다는 것이다. 교회의 목회자를 청빙하는 과정을 보니 전 교인 앞에서 공청회를 통해 많은 질문을 받게 되고, 이 과정에서 신학적인 질문이 더러 나오게 된다. 앞서 이력서나 자기소계서 등을 통해 신학적 질문을 하게 되는 데, 질문의 다수는 교회의 민주적 절차에 대해 동의하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공청회 가운데, 한 성도가 동성애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가진 후보자에 대해 불쾌함을 표시하는 질문을 하였다. 나중에 그 분은 교회의 중요한 분은 아니고, 이런 분을 잘 가르치는 것이 목사의 임무 아니냐는 말을 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한 표를 행사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단지 교회 직원을 한 명 채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목사를 채용한다는 것은 교회의 신학을 결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한 표는 신학을 결정하는 한 표인 것이다. 이 교회는 대중주의에 빠진 대형교회와 도덕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을 실낱하게 비판하면서 만들어진 교회이다. 그러나 이 교회가 채택한 민주적 절차에 따른 투명한 경영은 사회적 기준에서는 윤리적일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기독교의 진리를 바꿀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 되었다.

윤리적인 교회로의 개혁이 교회의 핵심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윤리적이란 말은 사회가 인정하는 수준의 윤리이지 성경이 말하는 윤리가 아닐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 기준이 교회적 기준과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진리관의 차이이다. 사회의 윤리는 상대적이며, 교회의 윤리는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윤리를 따라가면 더 좋은 인상을 줄 수는 있겠지만, 이 또한 대중주의에 영합하여 교회의 외연을 확장하게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주교회가 지난 교황의 방문 이후로 부흥한다고 하지만 이것 또한 교회의 교리와 신앙고백과는 관계없는 확장일 뿐이다. 대중이 원하는 윤리적인 이슈들에 부흥해 주니 이에 따른 반작용일 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교회의 윤리란 분명한 신앙고백을 통한 절대적 윤리이다. 그러기에 대중이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수호한다. 동성애나 낙태, 결혼과 이혼의 문제 등에 대한 분명한 변하지 않는 원리가 있다. 그러기에 대중에 영합할 수 없는 태생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교회의 문제는 성경적 진리관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 있지 성도들의 숫자가 감소하는데 있지 않다. 진리관의 변화보다 외연의 축소가 더욱 위기로 다가오는 것은 관용이라는 현대적 가치에 교회가 잠식되어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대형교회 중심적 교회나 현재의 개혁 중심적 교회나 문제의 해결을 절대적 진리 관을 세우기 위한 노력을 하기 보다는 윤리적 실천으로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 아닐까? 신원하 교수가 쓴 논문의 주제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문제는“이 윤리적 위기는 근본적으로 교회에서 초월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선포 그리고 그 빛에서 세상과 신자의 삶을 바라보고 가르치려는 것에 대한 메시지와 논의 즉 신학이 점점 주면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것은 “초월적 진리”가 교회의 중심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신원하 교수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면서 공적 신앙의 회복이나 초월적 능력을 신뢰할 수 있는 인격적 경험, 교회의 공동체성의 회복 등을 주문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제시한 마지막 내용에 답에 가까운 길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바로 구도자적 목회자의 재출현이다. 신원하 교수는 “현재 개신교의 목사는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고 그에 따라 사는 구도자형보다는 신자들의 요구를 채워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 교회를 성장시키는 경영인, 그리고 상담이나 행정 등에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전문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모습은 말씀과 삶이 통합된 신앙적 모델로서의 목회자의 모습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리더의 핵심이다. 예수님과 바울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나를 닮으라고 했다. 그것은 단순히 윤리적 완성으로서의 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구도자로서의 모습을 말한다. 이를 에르스트 트웰치는 “절대적 개인주의”(absolute individualism), 혹은 “종교적 개인주의”(religious individualism)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구도자적 모델로서의 목사직의 회복이 없다면 교회의 개혁은 없다고 생각된다.

느헤미야서 13장은 무너진 교회의 회복을 위한 단계들이 나온다. 느헤미야가 13년의 통치 이후에 아닥사드다 왕의 부름을 받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방인인 도비야가 성전의 창고에 자리를 잡았고, 유대 지도자들은 십일조를 횡령했으며, 그러기에 사람들은 십일조를 더 이상 내지 않았다. 이로 인해서 살 길이 막막해진 레위인들은 들에 나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마치 사사기의 마지막 장에 나온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하나님의 직분을 파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잠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먼저 이방인 도비야를 쫓아내고, 레위인들을 설득하여 성전에 돌아오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예배를 다시 시작하도록 한다. 초월성을 다시 회복한 것이다. 그리고 관리들을 정비하여 공정히 십일조를 집행하도록 한다. 이후 차세대를 위한 신앙교육을 정비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바로 교회의 개혁은 제도나, 윤리적 개혁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회복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나 윤리적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레위인들이 예배로 복귀했듯이 목회자들이 구도자의 위치로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 9월 15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