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하나님 나라 시민의 두 정체성: 소금과 빛(마태복음 5장 13~16절)

하나님 나라 시민의 두 정체성: 소금과 빛

(마태복음 5장 13~16절)

2020년 5월 17일 이춘성

 

오늘부터 우리는 새로운 예배를 시작합니다. 제가 새로운 예배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새로운 예배란 없습니다. 예배란 이 세상이 창조된 직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받는 분입니다. 인간은 예배받을 분을 당연히 예배해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으며, 그렇게 살아야 하지요. 하지만 세상은 이 인간의 본분을 거부했고,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예배 받아야 하는 존재를 예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1. 하나님 나라와 정체성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자주 듣고 사용합니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의 개념은 18세기 이후에 서구 유럽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일종의 시민 구성원들 사이의 계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국가의 3대 요소 하면 국민, 영토, 주권이라고 하지요. 거주지가 있고 주권을 지닌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 간의 계약 관계 속에서 정부와 국가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대 국가에서의 국가의 개념이란 그 의미가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때, 약 2000년 전의 국가란 획일화된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대인들에게 국가란 다윗 왕에 의해서 세워진 국가의 개념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포로 이후에 메시아의 의미가 더하여져, 국가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메시아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는 지금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현재 우리 신자들이 알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 개인의 주권을 굴복시키고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는 단지 구호로 끝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구체적인 정체성을 알아볼 것이며, 이후에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자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신자의 정체성을 두 문장으로 규정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역할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2. 소금

첫째, “너희는 세상(땅)의 소금이다. Ὑμεῖς ἐστε τὸ ἅλας τῆς γῆς·”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입니다. 이는 세상의 물질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땅 혹은 흙이라는 물성을 지닌 물질로 이해하고 이 물질을 변질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다른 물질이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소금의 짠맛은 그 특유의 짠맛 때문에 물질이 변질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구약 성경에서 소금에 대해 언급된 구절을 찾아보면 대부분 변치 않고 원래의 모습을 지키는 소금의 역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이런 소금의 기능을 성결하게 하는 기능이라고 말합니다(출 30:35).

 

3. 로마의 소금과 하나님 나라의 소금

당시에 이스라엘과 주변의 사람들은 사해에서 생산된 소금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닷물을 정제하여 소금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로마에서 상용화하여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소금을 생산하는 기술 때문에 막대한 부를 얻었고, 그 후에 세계를 통치하는 팍스 로마나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라틴어 sal은 소금이란 뜻으로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가 솔져, 셀러리, 샐러드 등의 영어 단어들이 있습니다. 로마에서 소금을 임금으로 받았던 군인들을 솔져라 부르며, 군인들의 급여가 셀러리이고, 소금에 절인 채소를 샐러드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렇듯 로마는 소금 생산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 제 일의 강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소금이 지니는 강력한 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하나님 나라는 소금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로마의 막강한 힘에 대항할 만큼의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예수님 제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은 우리가 지금 느끼는 충격보다 더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세상의 권력을 넘어서는 더 큰 권위와 힘을 약속합니다. 소금으로 사람을 지배하고 굴복시키는 세상의 권력과 권위가 아닌 더 큰 권위가 있다는 것이지요.

 

4. 참된 권위와 거짓 권위

그런데 만약 소금이 특유의 짠맛이 없다면 그 소금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러한 소금은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순도 높은 로마의 소금과 달리 순도가 높지 않고 불순물을 많이 함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소금이 녹지 않아 짠맛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였습니다. 이런 소금은 소금이었지만 실제로는 녹지 않아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소금처럼 투명하지만, 물에 녹지 않는 알갱이에 불과하며, 단지 쓰레기 덩어리이지요. 로마의 권력, 권위에 대항하여 더 큰 권위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할 제자와 신자들이 세상의 순도 높은 소금 보다 그 순도가 낮고 불순물이 가득해서 정작 소금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세상의 웃음거리, 더 나아가 예수님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소금이라는 정체성은 세상의 순도 보다 더 높고 성결한 그 무엇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권위가 세상에 세워집니다.

 

5. 소금의 존재감과 지혜

예수님이 제자들을 소금이라 규정하실 때, 이들은 자신의 존재감이 상승했을 것입니다. 소금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로마의 막강한 소금의 권력에 대항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쓸모없는 소금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자 중에 소금처럼 생긴 쓸모없는 소금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소금이란 무엇을 은유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학자들은 소금이 주는 은유가 지혜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당시 랍비 문헌을 연구하면 소금을 지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골로세서 4장 6절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소금이 말, 더 자세히는 말의 내용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말로 표현하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R. T. 프랑은 소금이 맛을 잃었다는 것은 “멍청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리석은 자, 지혜 없는 자가 짠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존재감, 자존감은 지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의 자존감을 세우는 지혜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제자들, 더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앎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과 자존감을 세울 수 있습니다.

 

6.  빛

두 번째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도 직역하면 “너희는 질서의 빛이다”로 번역됩니다. 여기에서 이미 짐작하겠지만 빛이 지니는 속성과 질서라는 의미를 합하여 이것이 법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체적으로 통치의 질서,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빛은 이 질서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16절에서 빛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빛은 하나님의 나라의 법에 따른 “착한 행실”입니다.

예수님은 빛의 기능에 집중하십니다. 빛은 산 위의 동네를 환하게 비추며, 어두운 집안을 환하게 만듭니다. 빛의 역할은 빛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빛 주변에 있는 것을 밝혀 빛 주변에 있는 사람이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러한 주변을 밝히고 길을 찾도록 해주는 빛이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John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John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John 1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John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John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이 세상의 참 질서와 원리가 무엇인지 밝히는 참 빛이 예수님입니다. 진리와 참된 삶을 알기를 원하지만, 어둠 속에 있으므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빛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빛이 비추고 그들이 갈 길이 보이게 된다면 어떨까요. 이것이야말로 복음이 아닐까요? 빛을 접하고 보게 된 자, 복음을 접한 자의 삶이 요한복음 9장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이때 난데없이 제자들 사이에서 신학 논쟁이 일어납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자는 왜 시각장애인이 되었냐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부모나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의 죄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된 원인을 밝히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일이 더 중요하다고 이들의 대화의 주제를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호수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말씀대로 하였지요. 그러자 그는 눈을 뜨고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이 일어난 때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은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빛을 보았다는 놀라운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시 신학 논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율법을 어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논하였던 것이지요. 예수와 시각장애인 모두 처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은 기적이 일어나고 진리의 빛이 비취는 데 이를 보지 못하는 영적 시각장애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처벌하기로 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이 시각장애인의 부모는 아들이 나았다는 기쁨보다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아들을 보호하는 것을 회피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었던 자는 바리새인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담대하게 말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Jn 9:30–33).

 

바리새인은 담대하게 진리를 말하는 시각장애인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 빛을 본 자들, 빛을 통해 진리의 길을 본 자들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자신이 본 빛을 증거합니다. 그들도 그 빛이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셨듯, 제자들과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Acts 13:47) 바울과 바나바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에게 주신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선포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에 참된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진리를 알리고 그 길로 인도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은 신자의 삶의 선택이 아니라 존재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하지만 빛의 인생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7. 빛의 역할: 도덕적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감동의 빛이 되기

예수님의 삶은 빛이 되어 스스로 빛나고 주목받는 인생이 되려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라 하면 주목받고 돋보이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예수님은 주변을 밝게 하여 빛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방향을 알게 하는 것이 빛의 역할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서 주변의 사람들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낙인찍는 일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덕적인 원리와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빛의 자존감을 자랑하지 않고 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이 하나님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겸손입니다. 교만한 빛은 빛이 아닙니다. 나만을 따라오라는 것, 주목하라는 것은 기독교의 빛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빛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빛은 내가 아닌 타인과 하나님을 빛나게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주변에 있으면 그 사람은 그가 당연히 가야 할 방향을 찾고 성부 하나님을 만납니다.

뉴욕시의 한 가운데 위치한 리디머 교회를 목회하시는 팀 켈러 목사님은 성경의 복음과 세상의 복음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더 나아가 서로 대척점에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복음은 ‘자신’, ‘자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그’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아닌 나 밖의 존재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은 온통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을 먹을지, 내가 누구인지 등 인간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벗어나야 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나를 벗어나 나 밖의 어떤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나와 우리를 봅니다. 만약 기독교가 세상과 같이 나를 이야기 한다면 그것이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말하는 여러 가지 것들 중의 하나일 뿐 유일한 그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나가 아닌 나 밖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나 밖의 두 존재를 인식하게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타인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타인을 마주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때 우리는 다시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예수의 눈은 있는데, 예수님의 손과 발은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괴리를 깨닫지만, 이는 우리가 빛이라는 증거이며, 빛의 삶을 더욱더 살아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빛이 눈에서 손과 발로 내려 올 때까지요. 그렇게 하여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빛의 삶은 세상을 감동시킬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