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다리미야."(영화 "기생충"을 본 후)
늦은 시간 짧은 영화 감상평을 남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보았다. 영화 중에 사기꾼 가족의 대화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돈이 다리미야" 구김살 없고 매너 있는 부자 가족을 보면서 자신도 돈만 있었으면 이렇지 않았을 거라고 신세 한탄하는 사기꾼 가족의 엄마의 독백이다. 결국 그 구김살을 펴주는 돈(고급 외제 차 열쇠) 때문에 부자집 아빠는 죽는다. 영화는 칼에 찔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기절한 자기 아이만을 돌보는 이기적인 모습을 통해 구김살 없는 순수한 이미지의 허상을 고발한다. 그렇다고 사기꾼 가족의 선택과 모습이 어쩔 수 없는 약자의 한계라고 긍정하지도 않는다. 이들의 지향점은 마지막 사기꾼 가족의 살아 남은 아들의 선택에서도 알 수있듯이 부자가 되어 이 비극을 만든 그 장소, 바로 유명 건축가가 만든 멋진 정원이 있는 부자집을 사는 것이듯 말이다.
감독이 설정한 지하에 사는 가난한 자들의 공통점, "대만 카스테라" 가게를 하다가 망했다는 것. 이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한다고 하며, 또한 가난과 비극의 원인을 가난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부유한 자들을 고발한다는 해석, 이런 계층 분리적 해석이 과연 옳은지는 모르겠다. 단지 여러 사람들이 야망을 품고 일을 하지만 여러 이유로 망하고 빚더미에 시달리는 것은 사실이니 그런 장치, 그리고 가난한자들의 비극에 대한 공감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영화의 감상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나에게 이 영화는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이기적인 욕망을 고발하고 있고, 이 욕망의 중심에는 돈이라는 현대의 만능의 수단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것이 사람의 외모만 그럴듯하게 만들뿐 성품을 바꾸지 못한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돈이 사람의 성품도 다리미처럼 빳빳하게 다려 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감독은 위기의 순간에 돈은 자기 밖의 타자로 나아가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까지는 나아가게 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부자집 아빠가 죽은 이유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마 이것도 지금까지 부자는 놀부 처럼 못됐을꺼라고 믿었던 신화처럼 우리의 바람은 아닐까? 영화는 끝까지 가난한 자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려 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존의 신화를 깨버린 지금 그런 기대감에 대해서 의심하게 만든다.
오래전 분당의 부유한 신자들만 모인다는 교회의 부교역자로 있었던 적이 있었다. 지내면서 놀란 것은 부자들을 향한 편견, 바로 영화 속의 편견이 깨진 것이다. 부자는 겸손했다. 원망도 없고, 검소했으며, 교양있는 언어로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딱! "돈이 다리미" 였다. 그래서 참 편안하게 사역을 하였다. 그렇게 많은 목사들이 그 교회와 지역을 떠나기 싫어 했다. 그러나 난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었고 결국 멀리 시골로 도망쳤다. 그러면서 스스로 매우 의로운척했다. 이것이 나의 속물 근성이라는 사실을 얼마지나지 않아 깨달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돈의 능력은 얼마나 대단할까? 인격, 영적 고상함 이런 것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밝히는 것이 종교의 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는, 기독교는 바로 그 길을 제시하는 것 아닐까? 복음은 그런것 아닐까? 그게 무얼까? 이걸 밝히고 알린다면 이것이모든 사람들이 알고자하는 기쁜 소식일 것이다.
영화는 종교에 묻고 있다. "그게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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