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교회에게 주는 오래된 교회 이야기
-「에게리아의 순례기」를 읽고-
(작성일: 2019년 2월 13일; 작성자: 이춘성)
에게리아가 4세기, 381년 부활절에서 384년 부활절 사이에 성지를 순례하고 384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록한 「에게리아의 순례기」는 초기교회의 예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여성인 에게리아가 동료 부인들에게 편지형식으로 쓴 성지 여행기이며, 둘째는 예루살렘 교회가 당시에 일상적으로 드린 기도회와 주일 예배, 주현절(Epiphany)과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교회당 봉헌 일에 행해진 예식과 예배에 대한 기록이다. 셋째는 세례 교육에 대한 것이다.
- 여행기
에게리아의 경험을 통해 당시 수도자들과 교회는 순례자들과 손님들을 극진하게 환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도자들과 교회는 손님들을 최대한 대접하고 여행을 안내하는 일, 다음 목적지까지 배웅하는 것 등 환대를 베풀었다. 또한 수도자들은 손님에게 선물을 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에도 고대 그리스 로마의 환대의 전통에 남아 있는 절차와 요소들이 여전히 실천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순례는 마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에게리아는 부인들에게 자신이 머무는 3년 동안의 여행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의 여정을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에 빗대어 설명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당시에 이미 기독교에는 미신적인 요소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에게리아가 에데사를 방문하여 아브가르 왕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왕이 예수님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페르시아의 침입 시에 이 편지를 읽어서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이후에도 모든 전쟁에서 이 편지를 성문 앞에서 읽으면 승리했다고 하니, 편지가 부적이 된 것이다. 비슷하게 예루살렘에 교회를 지을 때,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발견하였는데, 부활절이 되면 이 십자가의 일부를 함에 넣어 보관하다가 일반에 공개하고 신자들이 이에 입 맞추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입으로 물어뜯어 갔고, 이후에 사제들이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섭게 지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들도 많다. 예를 들면 느보산의 수도사들이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의 소금 기둥이 몇 해 전 까지 있다가 사해에 침수 되었다는 진술이다. 그 소금 기둥이 진짜 롯의 아내인지는 모르지만 비슷한 소금 기둥이 있었고, 이것이 침수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라 인정할 수 있다.
2. 초기교회의 예배
이 책을 통해서 초기교회의 예배가 일상 예배와 주일 예배로 구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상 예배는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동트기 전과 정오, 오후 3시와 4시 계속되었고, 이때는 설교가 없었고 기도와 시편 찬양, 강복(축복), 신자의 이름을 부르는 예식, 파송예식 등이다. 그러나 주일에는 동트기 전 기도회 후에 동트자마자 설교가 중심이 되는 예배가 이어진다. 설교는 원하는 사역자들 누구나 할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주교가 하고 마쳤다. 그래서 오전 11시 이전에는 예배가 끝나지 않았다고 하니, 약 4시간 정도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절차를 모두 따르는 것 보다 이러한 초기교회의 절차를 통해서 여전히 생각해봐야 할 것은 예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에 대한 것이다. 초기교회의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편 찬양과 이 사이에 드려지는 기도들, 설교들이었다. 기도는 철야기도와 새벽기도와 파송예식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런 의식들이 매일 이루어졌다. 또한 성찬이 시행되었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는 인상을 남긴다는 것이다. 오히려 에게리아는 교회의 성례 중에서 세례가 더 큰 비중과 중요성을 지닌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성찬은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일상적으로 한 형제라는 의식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세례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죄인이 의인이 되는 영적 부활과 육적인 부활의 신비로운 의식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3. 세례 전 교육
이러한 이유로 세례 대상자는 교육 전에 교회 앞에서 질문을 받고 증인들에 의해서 이들의 삶을 증명 받은 후에 세례 대상 명단에 오를 수 있었다. 예비 세례자가 받는 질문은 “세례 후보자는 착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부모를 공경합니까? 과음이나 거짓말을 합니까?”등 이었다. 그리고 잘못이 들어나면 잘못을 바로 잡을 때 까지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이웃에 의해서 삶을 증명할 수 없는 타지 사람들도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세례 교육은 부활주일 전 40일 동안 매일 3시간 동안 이루어지며, 이 기간 동안 창세기부터 성경전체를 공부하였다. 성경을 공부하는 이 시간을 교리교육(catechesis)이라고 불렀다. 이 공부를 마치면 신경(Symbolum)교육을 진행한다. 우리가 현대에 알고 있는 교리교육은 신앙고백 교육을 의미하는 데, 이는 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소요리(교리) 문답을 하는 것으로 세례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이 설교를 알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성경을 이해했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세례교육은 초기교회의 신경교육 수준 정도에 머물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후에 세례대상자는 자신의 신경을 교회에 바쳐야 했다. 개인적이며 공적인 신앙고백을 교회 앞에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교육에 빠져 있는 가장 중요한 교육이 있었다. 정작 세례의 의미와 그 신비에 대해서는 세례교육 기간 동안에는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4. 세례 후 교육
세례에 대한 가르침은 세례를 받는 부활절의 예식이 다 끝난 후에 주교가 신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쳤다. 이때는 예비신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교회의 문을 잠그고 방금 세례를 받은 자들과 이미 세례를 받은 자들만 세례의 신비에 대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어쩌면 부활절의 절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간에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감탄과 탄성 소리들이 들렸고, 모두들 그 신비에 대해서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러한 신자들의 모습은 밖에 있는 사람들(예비신자들)로 하여금 세례에 대해서 사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왜 세례 교육에서 세례를 가르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세례를 받지 않고는 세례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례는 사람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죄 사함과 구원을 받았다는 증표이며 부활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생명을 깨달을 수 없다. 세례를 통해 다시 산 신자만이 생명의 의미를 이해하기에 세례의 신비는 신자에게만 의미 있으며,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신비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절에 세례를 가르치는 전통은 현대교회에 되살리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5. 오래된 전통을 통해 배울 것들
「에게리아의 순례기」를 통해서 초기교회의 전통과 예전이 모두 좋으며, 이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 없다. 이 안에는 성경과 어긋난 것들이 있으며, 당시에도 토속 신앙과 결탁된 오염된 기독교가 있었다는 것도 보여준다. 하지만 초기교회의 예배와 말씀, 기도에 대한 열정과 더욱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원초적인 말씀에 대한 순종과 순결한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현대 교회의 실용적인 예배를 돌아보게 하며, 소비자 중심의 예배 형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예배와 삶이 분리된 안타까운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초기교회는 예배와 삶의 통합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려는 거룩한 열정과 이를 통해 신자의 삶을 교육시키는 교육적 기능,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려는 신자들의 거룩한 바라봄이 있었다. 더욱이 신자의 삶에는 부활의 신비가 강조되었다.
마지막으로 중세의 암울했던 종교개혁 전야가 아니었던 4세기의 교회에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이 지켜졌다는 것은 절기에 대해서 이를 거부하기 보다는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 절기들은 복음의 핵심을 신자들이 일상을 통해 경험하도록 만들어 이러한 습관이 하나의 성품이 되어 몸으로 체화되는 과정을 만들 수 있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설이나 추석의 정신이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한국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면 기독교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것이 어떻게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게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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